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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Sep 26. 2015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과 고독을 위한 자리

“요즘 애들은 참 낭만이 없어.”

그럼 되묻고 싶어 진다. 

“우리에게 낭만을 가르쳐 준 적이 있나요?”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낭만이 가르쳐주고 배운다고 생기는 거니?”

물론 배워서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낭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을 거다. 

그 흔한 스펙 하나가 없더라도 스펙*종 세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낭만이 허세가 되어버리는 시대     


조용한 새벽, A는 혼자 감미로운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빠진다. 한참을 추억에 잠겨 있다가  지난날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본다. 그리고 그 추억의 사진을 SNS에 올리며 감성적인 문구 한 마디를 적는다.

다음 날 아침, A는 어제 올린 사진과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며 하이킥을 할 것이다.

“웬 허세” “오글오글” “중2병 걸렸냐” “새벽에는 잠이나 자ㅋㅋ”     

물론 A가 그냥 혼자만의 감상으로 끝내고 SNS에는 올리지 않은 채로 조용히 잠들었으면 좋았을 거다. 하지만 어쨌든 A는 그때 그 감정에 충실했고, 낭만과 추억이 담긴 사진과 글을 누군가와 공유하며 나누고 싶어서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에는 낭만이 있으면 중2병 아닌가요?”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다.

낭만이 병이 되는 요즘.     


유세윤 글 中에서     


관심과 소통, 그 위에 낭만     


SNS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용도 역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딱 꼬집어서 SNS를 하는 것이 좋다, 나쁘다 단정 짓기 어렵다. 나는 채팅 기능이 있는 것 이외의 SNS는 하지 않는다. SNS의 순기능을 누리기에는 역기능의 폐해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SNS들의 순기능을 잘 살려서 활용하는 사람도 많다.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기능이든 역기능이든 그런 걸 다 떠나서, 어쨌든 20대들 사이에서 SNS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게 뭘까?  관심받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것이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위에 근본적으로 뭔가 헛헛한 마음, 누군가와 추억을 공유하고 싶고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고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닐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음이 오히려 낭만을 위한 자리를 뺏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지금 누가 어느 맛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막 무슨 소설을 읽었으며 별점은 몇 개인지, 

여행지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놀라운 풍경은 무엇이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그 신세계에 고독을 위한 자리는 없다.

홍합돌솥밥 따위를 찍어서 친구들을 위해 트위터에 올릴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과 나는 이 사진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되므로 나는 무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입니다.

친분으로 연결되는 이 세계는, 그러므로 투명하다. 

각자는 '우리'로 연결된다. 

'우리'는 기억도 공유하며, 판단도 함께 내린다.

'우리'는 고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자살하지도 않는다.     


김연수_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中     


그래, 우리 가끔 하늘을 보자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하늘 쳐다 볼 시간 따위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것 아닐까. 바쁜 현실 속에서 낭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감상에 젖을 시간에 이성적으로 빠르게 판단해 움직여야 한다고  세뇌당한 것은 아닐까. 살아가기보다는 살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려 낭만을 ‘허세’ 또는 ‘오글거림’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사실 마음속으로는 다 ‘낭만’을 갈구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했던 것 아닐까. 낭만을 꾸역꾸역 삼키며 애써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나치게 낭만에 빠져 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낭만주의에 잘못 빠져들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끼며 자칫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릴 위험성도 있다.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고,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도 늘 ‘현실주의자’로 살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어쨌든 현실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낭만’이 필요하다. 매사에 이성적이어야 한다면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일까? 그리고 가끔은 비현실적인 감상이 현실로 이뤄질 때도 있다. 낭만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고,  꿈꿀 시간도 생긴다.      


매일 숨 막히는 사회라는 전쟁터를 오가는 우리에게는 지금 낭만과 고독을 위한 자리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낭만은 무슨 낭만, 촌스럽게!” 

낭만이 촌스럽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촌스럽다. 분명 낭만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 테니까 말이다. 

하루에 한 번 시간이 날 때, 아니 시간을 내서 하늘 한 번 봐야겠다. 가을 하늘은 정말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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