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큰 이모

라디오 드라마 같았던 이모의 고독한 삶

by 현주 약안먹는약사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은 큰 이모와 살았다.

이모라고 하면 보통은 엄마랑 비슷한 연배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줄곧, 내가 기억하는 큰 이모는 항상 할머니였다.

형제자매 여섯 중에 나의 엄마는 막내였고, 큰 이모는 맏이였으니 나이차가 제법 있었다. 더구나 내가 어렸을 때, 이모는 늘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려 비녀를 꽂았고,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이모를 늘 할머니로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살게 된 이모

큰 이모는 그 지역의 유지와 결혼했지만, 결혼 후 아이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시집과의 아무런 연(緣)도 없어지자,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자신의 막내동생이 맞벌이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동생네 가족도 도울 겸 자신도 정착할 겸.

그때부터 이모는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


가슴으로 낳은 이모의 아들

이모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친척 중에, 자식이 병약하게 태어나 죽어가자 그 자식을 버렸다. 버린 자식을 이모가 데려와 온갖 정성으로 살려내었다.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이모의 아들이 되었다. 그렇게 그 아이는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나와는 열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오빠였다.

평소에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던 나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오빠는 나름 애를 썼다. 나는 유독 오빠에게만 나를 다섯 개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요구했다. 오빠가 나를 다섯 개의 이름으로 다 부르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대답하면서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나의 다섯 이름은 현주, 혜수, 꽃분이, 예쁜이, 미란이.

혜수는 집에서 불렀던 이름이고, 끝에 세 가지 이름은 내가 지어낸 이름이다. 그때는 그 이름들이 왜 그렇게 예뻤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온다.


대학생이었던 오빠는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오빠는 8살 무렵의 나에게 용돈줄 요량으로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오빠 덕분에 나는 주머니가 두둑했다. 용돈 받는 재미에 열심히 심부름했던 기억이 난다.


이모는 여느 아줌마들과 달리 억척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키는 자그마하고 마른 몸매였다. 복장은 늘 깔끔했고, 어딘지 모르게 소녀스러웠다. 어쩌면 자식을 안 낳아본 사람이었기에, 아가씨 같은 면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우리 가족과 오래도록 같이 살면서도 늘 자신의 매부를 어려워했다.


맞벌이하느라 바빴던 엄마 대신 이모가 살림을 하며 우리 형제를 키워냈기에 이모와의 추억이 제법 있다. 나가서 놀기보다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이모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이 있다.


어린 시절, 이모와 라디오 드라마에 빠졌다

이모와 나는 저녁시간에 항상 같이 듣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를 듣기 위해 나는 빨리 숙제를 끝내곤 했다. 앉은뱅이 책상에 라디오를 놓은 채 내가 이모를 부르면 이모는 급하게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드라마의 이야기가 우여곡절을 늘어놓을 때,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드라마에 빠져들어갔다.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의 저녁에 이모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저녁의 개운함과 이불속의 나른함, 그 속에서 이모와 같이했던 드라마 속 사람들과의 희로애락.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느낌들과 분위기는 두고두고 내 마음의 한켠에 남아있다.


일요일이면, 이모를 따라 성당에 가곤 했었다

이모는 젊은 시절, 절을 다녔다고 했다. 청상과부가 되기 전, 꽤 돈이 있었는데 그 돈으로 절 하나를 지었다고도 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이후로 이모는 천주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이모와 둘이 성당을 가곤 했었다. 성당 가는 길은 동네의 골목골목을 지나야 했고, 언덕을 지나다 보면 텃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 길들을 굽이굽이 돌아 야트막한 언덕에 성당이 있었다.

어린 나는 신앙이 뭔지도 모른 채 이모를 따라 미사에 가곤 했었다. 오며 가며 그 기나긴 길들에서 뭔가를 재잘거리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다. 그리고 늘 이모가 곁에 있었다.


오빠가 떠났다

이모는 오빠를 정말 지극정성으로 키워냈다. 이모의 기대에 부응해 오빠는 명문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했다.

오빠가 결혼하려고 여자를 데려왔다. 이모는 무슨 이유인지 그 결혼을 반대했고, 오빠는 집을 나갔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오빠는 떵떵거리며 잘 산다는, 자신의 친가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다. 자신을 버린 친가에 들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모는 더욱 야위어 갔다. 말라가는 풀잎처럼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처럼 느껴졌다.


이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나 힘들고 억울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혼신의 힘으로 길러낸 아들이 자신을 버렸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는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내가 이모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한 인간의 배신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오빠를 만나 오빠 입장을 들어봤다면 내가 오빠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이후로 이모는 오빠 얘기를 안 꺼냈고 우리 가족도 오빠 얘기는 금기시되었다.


이모가 요양원에 들어갔다

우리 형제는 자랐고, 오빠는 떠났다.

이모는 오랜 세월 사용하던 비녀를 풀고 머리를 짧게 잘랐고, 한복대신 평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어느 날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모는 잘 적응했을까, 나는 늘 걱정되었다. 이모는 마치 아이처럼 순박하고 마음이 무척이나 여렸는데, 무엇보다 사람들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는데.


엄마와 남편과 함께 요양원에 이모를 보러 갔다. 이모가 며칠 동안의 외출을 나왔다. 이모에게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 맘껏 먹자고 하자, 이모는 의외로 냉면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다던 냉면을 반도 못 먹었다. 짠함이 밀려왔다. 이제 이모는 몸도 더 왜소해졌고 먹는 양도 줄어 있었다.


이모의 죽음

그로부터 몇 년 후 이모는 돌아가셨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이모의 죽음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지만, 나는

자꾸 사촌오빠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모가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자신의 아들이 보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낸 적도 없는 이모는, 자신이 누군가의 짐이 되기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이모는, 그렇게 가셨다.


살다 보면 어느 날, 이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욕봤다.”

어린 시절 내가 뭔가를 잘 해내어 으스대거나, 뭔가를 못해서 풀 죽어있을 때, 이모가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그 한마디가 어찌나 따스하고 위로가 되었던지.

이제, 가끔은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욕봤다.”

그리고 중얼거려 본다. “이모, 애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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