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부부모임

장소가 불러온 27년 전 으로 시간여행

by 현주 약안먹는약사

가을의 끝자락 11월이었다.

가을이라기에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툼한 겨울옷을 챙겨 입고, 목도리도 단단히 맸다. 바람이 매서웠다.

연말 부부모임이 있어서, 퇴근 후 ‘모소리’라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10년 정도 이어오는 부부모임이었다. 남편친구의 부부다.

그 부인은 나랑 거의 동년배이고, 이제는 마치 나의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다. 예민하지 않고 털털하며 솔직한 성격 덕분에,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 속에서 10년 세월을 함께할 수 있었다.

다들 맞벌이를 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만나고 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 보니 평일 늦은 저녁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대편 부부가 추천해서 가게 된 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27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그 장소는 졸업 후 내가 처음으로 근무하던 약국이었다.


나의 졸업당시가 떠오른다. 졸업당시, 우리나라는 IMF금융위기로 휘청이던 때였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체제 하에서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정리해고가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우리의 아버지들이 직장을 잃은 채 거리를 헤매던 시절이었다. 생계를 잃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었고, 중산층은 붕괴되었다.


IMF위기는 나에게도 들이닥쳤다. 작은 아파트가 한채 있었는데, 전세입자의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급매해야 했다. 전세금과 매매가가 같았던 탓에 아파트 한 채를 고스란히 날렸다. IMF시기라 부동산가격이 바닥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 IMF때 졸업하는 바람에 취직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력서를 들고 다니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면접을 보러 다녔고, 가는 곳마다 떨어졌다. 결국은 엄마에게 부탁해 지인의 약국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렇게 취업하게 된 곳이 바로 오늘 모임 하러 온 장소였던 것이다.

약국이었던 곳은 세월이 흐르면서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그 약국은 조제가 제법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의약분업이 되면서 주변에 병원이 없어서 폐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래전에 머물렀던 장소에 있다 보니 그 시절의 일들이 생각났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그 약국에서 근무할 때에 남자직원은 까칠하고 쪼잔했던 거 외에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여직원은 꽤 기억에 남는다.

그 여직원은 미스엄.

그녀는 20대 초반이었다. 키도 어느 정도 컸고, 얼굴도 갸름하니 예쁘장했다. 무엇보다 참으로 착하고 조신했다.

그때 당시 나는 임신 중이었다. 워낙 아침을 거르는 편이었고 아침생각이 없어서 굶고 가면, 미스엄은 임신 중에는 굶으면 안 된다며, 뭔가를 사들고 오곤 했다.

일을 배워야 하는데, 남자직원은 나를 경계해서인지, 숨겨가며 일을 했다. 미스엄이 이를 눈치채고 주인약사의 조제기록을 적어서 넌지시 내게 건네주곤 했었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낯선 환경에서 느끼던 서툰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미스엄은 딱 보기에는 곱게 자란 도시의 아가씨 같았는데, 살아온 과정이 뭔가 파란만장했다.

아빠가 집을 나가면서 엄마와 언니랑 셋이서 전라도 깡촌에서 살았다고 했다. 집 뒤편의 작은 텃밭 외에는 논도 밭도 없이 살면서, 엄마가 일손이 필요한 이웃들 일을 봐주면서 생계를 이어왔다고 했다. 언니와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갔고, 주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야간에는 공장에서 보내주는 고등학교를 다녔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곳이 지금의 약국이라고 했다.

돈을 버는 대로 엄마에게 부치고 있는 착한 아가씨였다.


살면서 많이 힘들었겠다고 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씩씩하게 말한다. 시골은 자기만 부지런하면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웃의 일손을 덜어주면 식재료는 해결되고, 시골에선 따로 돈 쓸 일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엄마도 늘 이웃과 같이 지내면서 식사도 해결하고, 외로울 틈도 없다고 했다.


그녀는 서울생활 몇 년을 하면서 느낀 바가 많다고 했다. 서울 사람들의 생활이 더 팍팍한 것 같다고 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사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고도 했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이솝우화 '서울 쥐와 시골 쥐'가 생각났다. 화려하고 풍족한 듯 보이지만 늘 불안에 쫓기는 서울쥐, 소박하고 부족한 듯 보이지만 여유롭고 마음 편한 시골쥐.

내가 생각하기에도 시골생활은 좀 더 여유 있고, 보다 인간적이어서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한때는 나도 시골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출근길에 고가도로밑에 살고 있는 새들을 보면, 주변에 산과 공원도 많은데 왜 하필 공해가 많고 위험한 곳에 터를 잡았을까 의아하곤 했었다.

이처럼 시골사람들도 서울 사람들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공기 좋고 물 좋고 여유로운 시골을 놔두고 왜 힘들고 각박하게 서울살이를 할까라고.


생각해 보면 애초에 어디에서 터를 잡았느냐가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환경에 익숙해진다고 해야 할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줄곧 살아온 나도 가끔은 시골생활을 꿈꾼다. 그런데 막상 산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자연과 맞대면할 자신이 없다. 자연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침과 벌레들, 자연에 들여야 할 노동력도 자신이 없다.


어쨌든 미스엄은 그때의 인연을 계기로 내가 약국을 처음 오픈 했을 때, 나와 1년 정도 같이 일했다.

의약분업이 터지면서 약국을 폐업하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엄마가 있는,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한 언니가 있는 고향으로. 그리고 그녀도 그곳 사람과 결혼하면서,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살게 되었다.

자신의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행복에 겨워하는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착하고 긍정적인 마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녀의 소식도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세월이 무상하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저리게 느껴지는 말이다.

이제는 27년 전의 일터에서 추억을 곱씹는 나 자신만이 덩그마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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