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에서 모여든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

원주살이 <2>

by 현주

원주에서의 두 번째 집

원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 계약한 1년의 전세기간이 끝났고, 새로운 전세를 알아봐야 했다.

90년대 초반, 원주에는 아파트가 적었다. 수소문해서 찾다 보니 새로 지은 아파트 1층에 한 가구만이 남아있었고, 그곳에 전세로 들어갔다.

이사하는 날, 베란다에서 아주 작은 아기 쥐 한 마리가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 바쁜 듯이 오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비명을 지르며 질겁했겠지만, 처음으로 쥐가 귀엽다고 느꼈다. 생명이란 건 그 존재 자체로 예쁜 것일까 의아해하며, 나는 낯선 도시 원주에서의 두 번째 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선택의 여지없이 처음으로 살게 된 1층의 아파트는 무척이나 추웠다. 난방을 다른 집의 두배로 돌려도 추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추운 아파트에서 나름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원주살이가 시작되었다.


사랑방이 된 우리 집

당시 아들은 네 살이었다. 반상회를 한다고 해서 반장집에 모였다. 서울에서라면 가지 않았을 반상회를 사람들과 안면이라도 틀 겸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또래 엄마들과 아이를 미술학원에 함께 보내게 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우리 집이 1층이라는 점은 뜻밖의 장점이 되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 뒤, 엄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수다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참으로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렇게 차가웠던 1층 아파트는 동네 엄마들의 온기로 채워지는 사랑방이 되었다.


수아엄마와 요리교실

그중에서도 13층 수아 엄마와 유난히 결이 잘 맞았다. 아이들이 학원을 마치면 우리 집에 모여 넷이서 소박한 점심을 먹곤 했다. 살림과 요리에 서툴렀던 내가 대충 차려낸 밥상이었지만, 함께 나누는 온기 덕에 늘 풍성했다.

수아 엄마는 앳된 외모와 달리 살림 솜씨가 야무졌다.

우리는 일명 '둘만의 요리 교실'을 열었다. 내가 재료를 사다 놓으면 수아 엄마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요리를 가르쳐주었다. 참깨 볶는 법부터 강원도의 별미인 장떡, 산나물 무치기, 시원한 동치미까지. 그녀 덕분에 나의 투박했던 밥상에 원주의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수아엄마는 강원대 재학 중에 남편을 만났고, 부부는 둘 다 고향이 춘천이었다. 은행원인 남편의 발령기간 동안만 원주에서 살 거라고 했다.


그렇게 잘 지내던 중, 내가 수아엄마를 위해 비밀스레 해준 조언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면서 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 일로 수아엄마와 조금 어색해졌다.

나에게 인간관계는 늘 호기심 어린 시선에서 출발한다. 처음 대하는 사람을 나는 늘 좋게 바라본다. 그러다 그 사람과 접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차츰 그 사람의 단점도 보게 된다. 그래서 상처 입을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 쪽을 택하며 살아간다.


6층 언니와 콩국수

언니는 춘천이 고향이다. 남편은 중장비를 몇 대 갖고 있어서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하기도 하고, 직접 중장비를 몰기도 한다.

언니가 젊은 시절, 춘천에서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가와 긴 머리의 귀엽게 생긴 언니의 손을 잡으며, 대뜸 사귀자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했다.

가끔 보게 된 언니의 남편은 근육질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 생겼다. 언니가 연상이라 그런지, 언니는 유독 알뜰히 남편을 잘 챙겼다.


2층의 주희와 6층언니, 그리고 나는 셋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세명의 각자 다른 서울, 대구, 춘천의 말투가 교묘하게 어우러져, 다른 듯 닮은 우리는 섞여 갔다.

우리는 같이 김장을 담갔다. 아파트 입구에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어 두고는, 각자 집에서 필요할 때마다 가져갔다. 우리들은 우리의 솜씨를 자화자찬하며 김장김치를 겨울 내내 푸짐하게 먹었다.


내가 원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오던 날, 언니는 콩국수를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아 내려왔다. 배 고프지 않게 든든하게 먹고 가라며.


정 많고, 눈이 까맣고 컸던 6층언니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서울로 오고 2년 후였다. 남편이 젊은 아가씨와 바람 나서, 언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언니가 맡았다는데, 집에서 살림만 하던 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어떻게 이 험준한 세상을 살아갈까.

그래서 언니를 떠올리면 더 애틋하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원주

원주는 다른 강원도 지역처럼 산이 많고, 치악산과 백운산 등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산맥들이 동쪽과 남쪽을 둘러싸고 있는 침식 분지 형태다.

또한 한반도의 중심부에 가까워 지리적으로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분지여서였을까. 물이 흘러 가운데로 모이듯, 각 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만난 인연들도 대구, 부산, 춘천, 서울에서 온 이들이었다. 말씨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닮아 있었다. 그 외로움이 서로를 껴안게 했고, 서로를 의지하게 했다.


관계가 만들어준 충만감

원주에서의 삶은 뭔가 여유로웠고 느긋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의 만남도 안정감이 있었다.

전업주부로서 누렸던 자유로움, 그리고 관계가 만들어주는 충만감이 나를 꽉 채웠던 시간이었다. 공간은 단순히 빈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밀도 높은 온기로 세밀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원주에서의 시간은 내게 알려주었다. 집의 온도는 보일러가 아니라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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