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랄트 휘터
-"사랑의 감정이 채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다시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없다. "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의 비결이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몸에서 보내는 신호와 본능적 감각이 앞장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앞서겠다는, 혹은 스스로를 발전시키겠다는 나름의 구상을 따른다. 우리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상을 기준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것을 따라 산다.
-건강을 지키고 되찾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다.
-많이 움직이는 것은 우리 몸의 본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신선한 공기를 쐬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뇌의 신경세포를 위해서는 일할 시간도 필요하지만, 휴식하고 회복할 시간도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실천에 있다.
-그들은 어릴 때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안녕에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부모나 교사 혹은 또래집단처럼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기대를 채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몸이 보내는 메시지를 알아챘더라도 무시해왔고, 거기에 익숙해졌다.
-그러므로 뼛속 깊은 곳까지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타인과 공존해야 한다.
-서로를 하나의 존재로 마주하는 와중에 서로를 감동시키게 되고, 각자의 내면에도 감화가 일어난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며,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삶을 무엇을 위해 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만약 지금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태평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고 살았다면 행복이 들어오는 문은 작은 틈새도 없이 꽉 닫혀 있는 셈이다.
-불행에 흠뻑 빠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야 가끔 찾아오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행복감을 더 자주 경험할수록 뇌에 '충분한 양분'이 공급된다는 뜻이다.
-즉 재생과 자가 치유 능력이 더 잘 발휘된다. 영리하고 창의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일에 큰 만족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릇 있는 자는 더욱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는 성경 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즐겁게 사는 것, 만사를 자기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병들어도 분명 회복시켜줄 누군가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머리속을 그러한 구상으로 채운 사람들은 자기실현이나 자율과 자유를 향한 욕구가 느껴지면 쇼핑을 하고 다음 휴가 계획을 짠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어렵다. 분명 고통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세상에 적응하느라 잃어버린 것, 우리가 스스로 자기 뇌에서 지워버리거나 드러나지 않게 꼭꼭 덮어놓은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대만큼 훌륭하게, 완벽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준 무언가에서 고통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자신과 조화를 이룰 때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병에 걸려도 금방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과 조화를 이룬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불안은 신체 반응의 통합적 조절과 유기체의 자가 치유력을 저해하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다.
-인간 유기체에는 자가 치유력이 있고, 그 능력은 유기체 전체를 관장하는 통합 시스템, 즉 자율신경계와 호르몬계, 심혈관계와 면역계에서 발휘된다.
-애착과 결속을 향한 욕구
-자기 결정과 자주성 그리고 자유를 향한 욕구
-허기와 갈증, 수면 및 휴식 부족 혹은 운동 부족 및 육체 피로 등
-우리 인간에게 신뢰를 주는 원천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다리는 자신감이다.
-그러므로 불안을 일으키는 현혹자들의 메시지로부터 사랑하는 자녀를 보호하고 시은 사람이라면, 아이들이끊임없이 새로운 위기와 맞닥뜨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변에 나를 도와줄 친구와 가족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의자의 두 번째 다리다.
-'괜찮아. 다시 다 잘될 거야'라는 마음가짐은 불안을 대처하는 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신뢰의 원천이다.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대상으로 취급된 인간의 존엄성은 심각하게 파괴된다.
-이 점을 깨닫고 내가 완벽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풀려나면 더욱 겁이 나고 흔들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우리가 겸손이라 부르는 것을 배우고, 이후로는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을 자세를 갖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관성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경험이 허락되어야 한다. 아주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통일감, 유대감, 소속감, 창의성을 소환하여 이후 삶에서 겪었던 단절, 불일치, 몰이해, 무기력 등의 경험을 덮어야 한다.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백분 발휘하며 사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음 세 개의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먼저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이해력'. 다음으로 이해한 것을 적용하고 구체화하는 '조형력'.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해하고 설계한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미 부여 능력'이다.
-집이나 학교, 직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옳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던 아픈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을 억눌러야 한다. 사회적 고통을 억제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떤 신체적 이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몸에서 고통이란 형식으로 전달하는 신호를 뇌가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한다. 어디가 아파도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사회적 소외 때문에 생긴 고통을 지나쳤던 것처럼 몸의 신호도 그저 무시해버리는 데 익숙해진다.
-이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적극적인 모험가이자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기의 능력과 의미를 경험했기 때문에 친밀감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다.
-침해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기본 성질은 동일하다. 아이가 타인으로부터 기대와 계획, 지시와 평가, 조치와 명령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관계의 끈은 끊어지고 이 세상을 집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던 기분도 사라진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고 수용되지 못하는 고통스럽고 걱정스러운 경험을 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불해한 일이다.
-그들은 본래의 생명력을 잃었다. 뇌의 최상위부는 아직 괜찮을지 몰라도, 그 아래에서 신체 조절과 자가 치유력을 담당하는 신경망은 영구적으로 실조 상태에 놓인다.
-그저 그들을 믿는 아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들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때에만 관계가 유지되고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일을 멈추게 하면 될 뿐인데도 말이다. 성장기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
-자기 욕구를 너무 잘 억제한 나머지 자기가 성장하는 사회에 더없이 잘 적응하여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아이도 있다.
-때론 영화관에서, 때론 공연장에서, 때론 책을 읽다가, 종종 야외의 자연 속에서, 가장 흔하게는 다른 사람과의 감동적 만남을 통해서 일어난다. 한 인간의 삶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경험하지 못했던, 그래서 거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감각이 일순간 되돌아온다.
-이 길은 자기 삶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다시금 인식하는 과정이다. 주체성을 되찾는 것.
-이런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일관성을 이루도록 인도하는 자기만의 내적 나침반이 있다.
-디지털 기계는 욕구가 없다.
-삶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가는 와중에 우리는 병들 수 있따. 그 또한 삶의 일부이며 살아가는 과정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