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부모가 된다는 건, 나를 자꾸 미루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을 후순위로 미루는 데 익숙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 가족을 위한 책임감,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단단함.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나’를 돌보는 법을 잊는다.
어머니 몇 분과 함께 진행했던 학교폭력 가해학생 학부모 특별교육이 있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녀 문제로 마음이 위축돼 있었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아이가 아닌 ‘어머니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활동이 버킷리스트 작성이었다. 떠오르는 소망을 30개 적고, 그중 5개를 고르는 간단한 작업. 하지만 그 단순한 과정은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마음의 방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누군가의 딸로, 혹은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는 꿈이 많다. 그러나 ‘엄마’가 되는 순간 하루의 중심은 아이에게로 옮겨가고, 개인으로서의 목표들은 서서히 흐릿해진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버킷리스트에도 여러 소망이 적혀 있다. 그중 하나는 ‘포르쉐 타기’이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현대차 i30를 보며 “합격하면 저 차를 타고 출근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품었다. 결국 합격했고, i30 친구인 아반떼를 타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소망은 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삶 어딘가에는 반드시 닿는다는 것을.
자동차 이야기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버킷리스트에는 ‘책을 쓰는 일’도 있었고,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 역시 그 마음의 연장선 위에 있다. 중요한 것은 꿈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알고 있는가”다. 그 작은 인식이 현재의 나를 이끄는 방향이 된다.
버킷리스트 활동을 진행할 때 어머니들은 처음엔 어색해하며 웃곤 한다.
“이런 걸 다 적어보네요?”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나’를 다시 바라보는 연습이라고.
잠시 후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각자의 어린 시절, 잊고 지낸 꿈들이 조용히 얼굴을 내민다. 교육이 끝난 뒤, 몇몇 어머니들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꺼내놓았다. “아이 문제만 생각하다 보니 제가 너무 우울해 있었어요.” “저 자신을 떠올린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요.”
자녀의 문제에 매몰된 채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눈시울을 붉히는 분들도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 어머니들의 얼굴빛을 한층 부드럽게 바꿔놓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은 익숙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은 너무 자주 놓친다. 아이와 배우자, 직장과 책임을 먼저 챙기다 보면 정작 ‘나’는 늘 가장 뒤에 선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피곤하면 쉬어주고, 울적하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잘한 일에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어떤 부모님들은 말한다.
“저는 괜찮아요. 아이만 잘 크면 돼요.”
하지만 아이가 괜찮아지기 위해서는 결국 부모도 괜찮아져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아이도 자기 자신을 아끼는 법을 배운다.
수많은 역할 속에 분주하게 살더라도, 모든 변화는 하나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
그 단순한 진실이 삶의 방향이 되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