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10. 위로의 이유들 – 누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격심한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쉽게 위로를 받았다고 느끼게 된 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위로의 이유를 필요로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398)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인간이 겪는 가장 근원적인 고통 중 하나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우리는 장례식장에 모여 슬픔을 나누고,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히 쉬실 거야”,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실 거야”와 같은 말들은 슬픔에 잠긴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연대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애써 ‘위로의 이유’를 찾는 행위의 주된 동력은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순수한 이타심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 이면에는, 너무나 빨리 슬픔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불편함과 이를 변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날카로운 지적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지만,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에 빠졌고, 장례식장에서는 친구의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다른 친구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어느새 친구를 잊은 듯한 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내가 이렇게 빨리 친구를 잊어도 되는 걸까?’, ‘나는 감정이 메마른 냉정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그 애는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명랑한 아이였으니, 우리가 슬퍼하는 것보다 평소처럼 재미있게 잘 지내길 바랄 거야”와 같은 ‘위로의 이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말은 나 자신을 향한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고인이 나의 행복을 바랄 것이므로, 내가 더 이상 슬픔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자기 합리화의 근거를 제공했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한 애도의 기간과 슬픔의 깊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나의 실제 감정을 정당화하고, 너무 쉽게 위로받은 자신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위로’라는 가면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셈이다.
진정한 위로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너무 빨리 괜찮아지는 자신의 모습, 슬픔 속에서도 문득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 등 모순되고 불편한 감정의 흐름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슬픔의 사회적 가면을 벗고, 자신의 내면을 불편함까지 포함하여 온전히 마주할 때 비로소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니체의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