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역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by 이시영

511. 신념에 충실한 사람들 -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일반적인 견해와 입장들을 거의 변화 없이 유지한다. 이념의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 그는 결코 이념 그 자체를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일을 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게다가 이념을 여전히 논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에 어긋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398)


우리는 흔히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한 길을 가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흔들림 없는 태도는 강한 의지와 깊은 통찰의 증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이 특정 신념이나 이념에 깊이 헌신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그 신념 자체를 되돌아볼 기회를 잃어버린다.

어느 신규 공무원은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민원인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귀담아듣고, 현재의 규정이 정말 모두에게 공평한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깊이 고민한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규정집을 파고들고, 더 나은 행정 서비스를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처리해야 할 민원과 서류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 ‘공정한 절차’라는 신념은 더 이상 성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한 민원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기계적인 기준이 된다. 눈앞의 민원인이 규정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도, ‘이것이 정말 최선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원칙은 원칙이다’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된다. 신념을 되돌아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근본적인 신념을 의심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평생을 ‘원칙과 규정 준수’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공무원의 경우 그의 정체성, 경력,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모두 그 신념 위에 세워져 있다. 만약 그가 어느 날 자신의 신념, 즉 ‘규정만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업무 방식을 바꾸는 것을 넘어 자신의 공직 생활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는 엄청난 심리적 혼란과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협하는 새로운 제도나 예외적인 사례를 외면하고, 원칙을 고수했던 성공적인 경험만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이념은 이제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교리’가 된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확고한 신념은, 어쩌면 그가 너무 바쁘거나 혹은 그 신념을 의심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사유를 멈춘 결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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