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63. 쉽게 체념하는-과거를 추하게 만드는 상상력을 연습해 두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들 때문에 그다지 고통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11)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종종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는 유령이 된다. ‘그때 그 기회를 잡았더라면’,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아파트 갈아타기를 했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은 과거를 실제보다 아름답게 포장하고, 현재의 삶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루지 못한 소망은 기억 속에서 빛나며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니체가 말하는 ‘과거를 추하게 만드는 상상력’이란, 선택하지 않은 길에 존재했을 필연적인 어려움과 단점들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놓쳐버린 기회의 장밋빛 미래만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합격하지 못한 회사, 떠나보낸 연인, 포기해야 했던 꿈.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결점 하나 없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색된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들어갔다면, 상상 이상의 업무 스트레스와 치열한 내부 경쟁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갔다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상처를 남기며 헤어졌을 수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신문사 기자가 되는 꿈을 꿨지만, ‘명문대’라는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온 동기들이 언론사에 입사하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내 능력이 아닌 출신 학교 때문에 실패했다는 생각에 깊은 패배감과 질투심에 시달렸다. ‘그 학교에만 갔었더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 텐데’라는 후회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의식적으로 ‘추한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만약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기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밤낮없이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특종 경쟁에 내몰려 원치 않는 기사를 써야 했을 수도 있고, 불규칙한 생활과 잦은 야근으로 건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가 걷지 않은 길의 고단함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자, 학벌에 대한 오랜 미련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상상력은 과거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도구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던 저울에 반대편 추를 올려놓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루지 못한 소망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물론 모든 것을 체념하고 꿈꾸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열망은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그림자에 발목 잡혀 현재를 놓치고 있다면, 니체의 조언은 우리에게 유용한 심리적 방패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기에, 미련과 후회는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하지만 그 감정에 잠식당할 필요는 없다. 선택하지 않은 길의 화려함에 눈이 멀 때, 잠시 멈춰 그 길에 숨어있을지 모를 자갈과 진흙을 상상해보자. 그 ‘추한 상상력’은 우리를 과거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현재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