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67. 적대시함으로써 유리한 점 ㅡ 자신들의 공로를 세상에 완전히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강한 적개심을 일깨우여 애쓴다. 그때 그들은 적개심이 그들의 공로와 그 공로를 인정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래서 많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인정받는 데 아주 유리한 바로 그것을 추속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12)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상이 나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이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어떤 이는 좌절감에 빠진다.
이 아포리즘에서 ‘적대감’은 편리한 자기 위안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재능이나 노력이 왜 인정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는 대신, ‘저 사람 때문에’, ‘저 집단 때문에’ 내 가치가 가려져 있다는 단순한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 가상의 ‘적’은 내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완벽한 방패막이가 된다. ‘적이 나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나는 뛰어나지만 단지 방해꾼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달콤한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공무원 사회도그렇다. 능력은 있지만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자신의 정책 제안이 묵살당하는 자는 자신의 성과가 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지, 조직 내 역학 관계나 소통 방식에 문제는 없었는지 성찰하는 대신, 특정 상사를 ‘적’으로 규정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저 상사만 없으면 내가 인정받을 텐데’, ‘그가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나를 억누르고 있다’고 불평하며 모든 실패의 원인을 상사에게 돌린다. ‘적’의 존재는 그의 부족함을 직면하는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그는 ‘부당한 권력의 희생양’ 역할을 자처하며,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는 듯한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부당한 억압과 방해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니체의 경고는 우리가 외부의 적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지금 나의 이 분노와 적개심이 정말 부당함에 대한 저항인가, 아니면 나의 무능과 나태함을 가리기 위한 편리한 핑계인가? 어쩌면 우리가 적을 만드는 데 쏟는 그 에너지를, 세상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쏟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가치는 적이 있기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없어도 스스로 빛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