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80. 좋지 못한 기억력 - 좋지 못한 기억력의 장점은 똑같이 좋은 사물들을 여러 번 처음처럼 즐기는 데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15)
우리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큰 장점으로 여긴다. 중요한 약속이나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고, 한 번 본 책의 내용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능력은 분명 편리하고 유용하다. 반대로, ‘나쁜 기억력’은 종종 건망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불편하고 고쳐야 할 결점처럼 취급된다.
이 아포리즘은 망각이 저주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주는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졌다고 상상해보자.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의 모든 장면과 대사를 평생 잊지 못한다면, 두 번째 볼 때의 감동은 결코 처음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나를 웃게 했던 농담은, 그 내용을 완벽히 기억하는 순간 다시는 나를 웃게 할 수 없는 박제된 과거가 된다. 완벽한 기억력은 어쩌면 모든 경험에서 ‘새로움’을 앗아가 버리는 잔인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가진 최고의 장점 중 하나로 ‘영화를 잘 잊어버리는 능력’을 꼽는다. 나는 영화를 볼 때 깊이 몰입하고 감동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세세한 내용을 곧잘 잊어버린다. 덕분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을 몇 년 주기로 꺼내보며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느낀다. 얼마 전에도 나는 몇 년 전에 봤던 한 영화를 다시 보다가, 내가 완전히 잊고 있던 반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릎을 쳤다. 옆에 있던 친구는 “너 이거 봤던 영화잖아”라며 어이없어했지만, 나는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와 거의 똑같은 짜릿한 즐거움을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었다. 나의 좋지 못한 기억력이 나에게 똑같은 행복을 두 번 선물해준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영화나 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의 좋았던 추억에 얽매여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좋은 기억은 달콤한 꿀인 동시에, 현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독이 된다. 반면, 좋았던 기억을 적당히 잊을 줄 아는 사람은 과거의 영광에 기대는 대신, 현재의 순간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선다. 어제 먹었던 맛있는 음식의 감동을 조금 잊었기에 오늘 먹는 평범한 식사에 감사할 수 있고, 지난 여행의 완벽함을 조금 잊었기에 다음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다.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매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풍경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익숙한 음악에서 처음 듣는 듯한 위로를 얻는 능력이야말로 좋지 못한 기억력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기쁨이다.
니체는 훗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대한 정신의 최종 단계를 ‘어린아이’에 비유했다. 과거의 의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낙타도, 그것에 저항하며 파괴하는 사자도 아닌, 모든 것을 잊고 매 순간을 놀이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정신. 어쩌면 니체가 말한 ‘좋지 못한 기억력’은 바로 이 창조적인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가는 첫걸음이자, 삶을 신성하게 긍정하는 가장 순수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 문제는......해야할 일들을 자꾸 망각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