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622. 세계에 대하여 너무 좋게 생각하는 것과 너무 나쁘게 생각하는 것 - 사물들에 대하여 너무 좋게 생각하거나 너무 나쁘게 생각하거나 간에, 사람들은 거기에서 항상 좀 더 높은 쾌감을 거두어들이게 되는 장점을 가진다 :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너무 좋은 선입견을 가질 때 사물들이 실제로 함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당분을 사물들(또는 체험들) 속에 넣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나쁜 선입관은 유쾌한 실망감을 초래하게 된다 : 사물 속에 있었던 유쾌함이 불시의 유쾌함에 의해 커지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어두운 기질을 가진 사람은 양쪽 경우에 정반대의 체험을 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35)
나는 내 마음이 멋대로 현실을 재단하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중요한 여행을 앞두고 있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 혹은 기대되는 영화를 보기 직전에 내 마음은 이미 그 경험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품는다. 때로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최악의 상황만을 상상하며 미리부터 걱정한다.
흔히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잘되지 않는다. 그런데 니체는 사물들에 대해 "너무 좋게 생각하거나 너무 나쁘게 생각하거나" 간에, 두 가지 방식 모두 "항상 좀 더 높은 쾌감을 거두어들이게 되는 장점"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 말은 나에게 기대와 현실의 관계, 그리고 '쾌감'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니체는 우리가 "너무 좋은 선입견을 가질 때 사물들이 실제로 함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당분을 사물들 속에 넣게 된다"고 말한다. 전에 꼭 가고 싶었던 여행지를 몇 달 동안 준비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곳의 풍경 사진을 매일 찾아보며, 그곳에서의 완벽한 하루를 머릿속으로 수십 번도 더 그렸다. 그 설렘과 기대감은 여행을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지만, 기대감 자체가 주는 쾌감은 분명히 존재했다. 물론, 실제 여행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다. 날씨가 궂은 날도 있었고, 기대했던 레스토랑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니체의 말처럼, 나는 이미 그 여행에 너무 많은 '당분'을 쳐둔 상태였다. 나의 '좋은 선입견'은 그 경험 전체를 달콤하게 만들었고, 사소한 실망조차도 전체의 즐거움을 깎아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거두어들인 쾌감의 총량은, 아무 기대 없이 떠났을 때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너무 나쁜 선입관" 역시 쾌감을 가져다준다. 니체는 이것이 "유쾌한 실망감"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즉, "사물 속에 있었던 유쾌함이 불시의 유쾌함에 의해 커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경험 역시 잘 알고 있다. 예전에 꼭 참석해야 하는, 하지만 정말 가기 싫었던 업무 관련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분명 지루하고, 불편하며, 시간 낭비일 것이라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내 기대치는 바닥, 아니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음식도 괜찮았고, 뜻밖에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동료도 만났다. 만약 내가 평범한 기대로 그 자리에 갔다면, 그저 '그럭저럭 괜찮은 모임' 정도로 기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악'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 '그럭저럭 괜찮음'이 마치 '엄청난 행운'처럼 느껴졌다. 바닥을 쳤던 기대감 덕분에, 현실 속의 작은 유쾌함이 예상치 못한 기쁨, 즉 '불시의 유쾌함'에 의해 몇 배로 증폭된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 영리한 쾌감 수확법에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어두운 기질을 가진 사람은 양쪽 경우에 정반대의 체험을 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내 마음이 '어두운 기질'에 사로잡혀 있을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지치고 우울할 때, '너무 좋은 선입견'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완벽해야 해'라는 기대는 '당분'이 아니라 무거운 압박이 되었다. 그리고 사소한 흠결이라도 발견되면, 나는 "유쾌한 실망"이 아닌 "비참한 실망"을 경험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현실의 작은 오류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느끼며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너무 나쁜 선입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안 될 거야', '분명 지루할 거야'라는 어두운 예상은, 막상 현실이 되어버리면 '유쾌한 실망감'을 주지 않는다. 그저 "거봐, 내 말이 맞았어"라는 냉소적인 자기 확인에 그칠 뿐이다. 이는 쾌감이 아니라, 자신의 어두운 세계관을 다시 한번 강화하는 고통의 확인 과정일 뿐이다.
내 마음이 건강하고 밝을 때, 기대라는 설탕은 현실을 더 달콤하게 만들고, 걱정이라는 쓴 약은 오히려 현실의 작은 기쁨을 값지게 만든다. 나는 오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이 '선입견'이라는 렌즈를 다시 닦아본다. 나는 지금 쾌감을 거두기 위해 의식적으로 당분을 치고 있는가, 아니면 유쾌한 실망을 준비하고 있는가? 혹은, 나의 어두운 기질이 이 모든 쾌감의 가능성을 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선입견은 결국 나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즐기는 '요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