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내 잘못이 아니다 _ 2화
아빠에게는 큰 형수님이자 나에게는 영산포 큰어머니.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나와 공유하시는 분이다. “응. 똥통에 빠졌던 수진이?” 우리 집 네 딸들 중 나만 유독이 기억하시는 이유이자, 나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다니는 수식어이다. 아빠는 그 말을 큰형수님께 들을 때마다 피식 웃으신다. 이미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딸의 똥통 사건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 우스움이다.
돈벌이를 위해 외국으로 떠난 남편의 빈자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딸만 4명을 키우는 엄마는 이미 삶이 버겁다. 넉넉하지 못한 셋방살이의 설움은 친절한 집주인 아주머니의 보살핌에 많이 의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육아를 도와주어도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밀려 닥치는 집안일들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예쁜 막내가 태어난 해는 엄마에겐 최고로 힘든 해였다. 내가 갓 6살이 되었을 때이다. 엄마와 함께 성북동 고갯길 언저리에 사는 엄마의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집 한가운데 큰 난로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탁자인 줄 알고 양손바닥으로 난로를 짚어버렸다. 아차 하는 순간 양손을 크게 데었다. 응급처치로 급하게 소주를 양손에 들이붓고 부풀어 오르는 손바닥에 바셀린을 잔뜩 바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붕대로 칭칭 감긴 두 손은 이제 쓸 수가 없었다. 밥도 혼자 못 먹고, 뒷일도 혼자 처리하지 못한다. 6살짜리 여자애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그런 상황이 더 속 터지는 것은 엄마였다.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한데 혹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엄마는 친할머니 댁으로 나를 유배(?) 보내기로 결심했다. 온 가족이 전라남도 영산포 나주의 친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가, 내가 딴짓하는 사이 나만 놔두고 모두 서울로 튀는 전략을 썼다. 아주 비겁하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어댔다. 안 그래도 항상 나를 놀리던 이모는
“네 친엄마는 청계천 다리 밑에 산다! 봐봐! 너만 피부가 까맣잖아. 엄마가 다르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며, 나의 울음이 터질 때까지 놀려대던 그 못된 이모의 내 ‘고아설’이 거짓이 아닌 진실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울어대는 나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달래주던 큰엄마의 품은 따듯했다. 6살 배기인 나는 그 집에서 가장 어린 존재였다. 큰집 오빠들도 가장 어린 쌍둥이 오빠들이 중학생이었으니, 갑자기 집에 나타난 어린 여자애는 매우 신경 쓰이는 존재였을 것이다. 거기다 어딜 가든 쫓아다니는 통에 여간 귀찮았을 테지만, 오빠들은 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나주의 사계절이 모두 기억난다. 봄 논바닥에서 모내기를 하던 재순 오빠의 다리에 올라 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 착륙 지점을 잘못 잡아 재송 오빠 등에 깔려 죽은 새끼 제비의 처녀비행, 장마철 불어난 물이 맹렬하게 흐르는 논둑을 떠내려가던 배가 볼록해진 흰 염소 사체, 바닥이 검은 줄 알고 발을 내디뎠더니 수천 마리의 개구리 행렬이었던 놀라움, 초 여름 낙과한 복숭아로 만들어 먹던 달콤한 복숭아 절임, 벼를 수확한 논에 뱀과 메뚜기를 사냥하러 다니던 가을, 비료 포대를 엉덩이 밑에 깔고 눈 쌓인 대나무 숲에서 신나게 타던 썰매, 비료 포대는 엿과 바꾸어 먹어버린 손주들에게 빗자루를 탑재하고 역정을 내는 할머니한테서 도망치던 겨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일은 초여름의 어느 날, 똥통에 빠졌던 일이다. 그 당시 시골의 화장실은 모두 ‘푸세식’이었다. 파리와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똥이 가득 차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 바닥엔 허술하기 그지없는 발판이 공중에 떠있었다. 발을 겨우 걸쳐서 쪼그려 앉아야 하는 그 변소는, 발판 사이의 폭이 어린아이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넓었고 심하게 흔들거렸다. 처음에는 변소 근처도 가지 못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용변을 봤다. 시간이 지나고 용기를 내어 변소를 가기 시작했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발판에 양팔을 걸치고 매달려 있던 나를 큰엄마가 건져 올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울고 있었고, 옷을 입은 채로 물세례를 맞고 있었다. ‘아이고’를 연발하며 큰엄마는 나에게 물을 뿌려 오물과 구더기들을 제거하고, 옷을 벗기고, 놀란 나를 진정시켰다. 똥독이 올랐을까 봐 적잖이 걱정한다. 그날부터 동네에서 독보적인 놀림감이 된 것은 두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성북동 엄마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새까매진 얼굴로 나주 부덕동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집에 와보니 낯선 얼굴이지만 아는 사람이 서울에서 왔다. 아빠다. 나를 서울로 데려가려고 온 것이다. 내년에 학교를 가야 한다나 뭐라나…, 아빠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발한다. 아쉬워하는 큰엄마와의 작별 인사는 대충 얼버무리고, 엄마를 보러 간다는 말에 서둘러 할머니 댁을 나선다. 우리를 태우고 가는 버스의 창가에 서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 밖은 마치 지옥이라도 되는 듯 빨간 십자가가 곳곳에 가득하다. 유황 냄새처럼 느껴지는 버스의 기름 냄새와 역겨운 구토 냄새에 절여져 있는 서울은 처음 본듯한 느낌이다. 캄캄한 밤중에 서울에 도착했다. 한참을 걸려 서울 성북동, 엄마와 올망졸망 아이들이 몰려있는 셋방에 도착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속상해한다.
“아이고, 촌 년이 다 돼서 왔네. 꼴이 이게 뭐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게 왜 나만 두고 도망갔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또 나의 잘못이어서 버려질까 봐 조용히 있었다. 얼마 전 똥통에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또 기겁을 한다. 다시 하얘질까, 혹여 그 냄새가 아직도 날까. 나를 계속 씻기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 발톱을 깎아 대는 통에 한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디가 나의 진짜 집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를 살갗이 벌게지도록 씻어내는 이 사람이 나의 진짜 엄마가 맞는 걸까? 그 이후에도 나주에 큰엄마를 만나러 갈 때에는 성북동 엄마를 놓칠까 봐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똥통에서 건져졌던 충격적인 기억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엄마에겐 덜 아픈 손가락도 있었고,
그것이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꼬리표처럼 평생 나를 좇아 다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