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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7. 2022

BC 2300, 고조선제단에서 고인돌 지나 세종릉까지

한민족의 시작

고조선은 천자국이었다. 십년 마다 열리는 제천행사는 아사달의 것이 그대로 이어졌다. 제단은 왕검성에 보관하다 십년 마다 천km 도 더 떨어진 아사달까지 이동했다. 가로세로 300미터에 달하는 정도의 제단을 옮겼다니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다.       




   

물론 다른 점은 배달 아사한의 한웅께서는 단지 참관자였지만, 고조선에서는 단군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셨다는 점이다. 제정일치가 이루어졌기에 고조선은 더욱 강력하게 국가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십년 마다 펼쳐지는 행사에 곳곳의 대표들은 열심히 찾아왔다. 십년 간 기후에 대해 요청하고 또 확인 받는 자리였기에 기필코 직접 찾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허락된 자가 아니면 행사장에 들어올 수 없었다. 랑들이 지키고 있었고, 그들 각자는 신선의 후보생들이었다. 배달까지는 릴이라 칭했고, 고조선 이후는 랑이라 불렀다.




BC1400년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고조선은 천자국으로서 동아시아의 로마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제천행사의 제단은 무덤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우리 민족의 무덤에 대해 짚어본다.     




배달 때는 돌판을 두고 사람을 눕혔다. 그런데 그 돌판은 산 꼭대기에 있었기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먼지가 되었다. 이것을 풍장이라 한다. 산 꼭대기에 무덤 제단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산에 살았던 아느에서와 같이 죽어서 그 곳을 향하길 원했던 것이다. 풍장 문화가 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조장으로 바뀌었다. 새들에 의해 시체의 육신이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는 아느계 유민이 공통으로 갖는 무덤 양식이다. 켈트족 역시 풍장, 조장을 유지했다.     




고조선의 전반기에는 아랫돌이 4개인 고인돌을 사용했다. 아랫돌 위에 얹는 수평돌의 윗편에 별자리를 새겼다.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에 별자리를 새긴 것이다. 위에서 보면 ㅁ자 모양으로 동서남북, 벽을 세우고 넓은 천정을 만들었다. 이후 돌 위에 시체를 올려둔 뒤, 뼈만 남으면 방 안으로 옮긴 이후 앞쪽의 돌을 옮겨 막아버렸다.    




                             

<요동반도 석목성의 고인돌>

고조선 후반기 이후 부터는 아랫돌이 2개인 고인돌을 사용했다. 아랫돌의 크기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되는데, 북한부터 만주 쪽은 돌이 많았기에 세로돌의 크기가 큰데 반해 돌이 부족한 한강 이남은 아랫돌의 크기가 작았다. 당시 경상도는 사람이 적어서 고인돌의 개수가 많지 않았고 전라도나 충청도는 돌 자체가 적었다. 또한 마한은 강력한 권력자가 없었기에 피라미드를 만들 일이 없었다. 이 역시 5세기까지 지속된 것이다.     



<평양 강동군 고인돌>



 

<김해 구지봉 고인돌>

 

                  

고구려는 피라미드를 만들고 피라미드 윗편에 관을 놓고 집을 짓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죽어서 하늘로 간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땅을 파고 드는 식이다. 애초 황토고원의 회화족은 집 역시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태였는데 무덤 역시 마찬가지다. 죽어서 흙탕물 한방울이 된다는 그들의 풍속을 그대로 따른 모습이다. 회화족에게 동화된 상나라는 피라미드를 거꾸로 땅에 박아놓은 형태로, 이는 상나라에서만 채용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봉분의 모습은 땅 아래에 관을 묻고 땅 위에 봉분을 만드는 방식인데 이는 지옥으로 갈 것을 기원하는 무덤형태이다. 더 이상 아느 인으로 태어나지 말라는 기원이다. 이것은 원나라 침략 이후 만들어진 형태다. 회화족 입장 더 이상 한반도에서는 천자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고구려 식은 피라미드를 만들고 피라미드 윗편에 관을 놓고 집을 짓는 방식이고 중국은 땅을 파고파는 식이었다. 우린는 죽어서 하늘로 간다는 의미고 중국은 죽어서 땅으로 간다는 의미다. 특히 상나라는 피라미드를 거꾸로 땅에 박아놓은 형상이며 상나라에서만 채용한 형태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봉분의 모습은 땅 아래에 관을 묻고 땅 위에 봉분을 만드는 건데 이것은 지옥으로 갈 것을 기원하는 무덤 형태이다. 더 이상 아느 인으로 태어나지 말라는 문화이다. 이것은 원나라 침략 이후 만들어진 형태이다. 이는 더 이상 우리 민족에게서 천자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흙은 영혼을 가둘 수 있다. 돌은 영혼과의 교집합이 없다. 이는 믿음이 아니고 중간입자적 차원에서 사실이다.





이것은 아느의 지식이다. 고인돌은 영혼이 헛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무덤의 방식이다. 죽음 직후 영혼은 혼란스럽다.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돌 위에 누워있다면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만약 흙 위에 누워 있었다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결과적으로 흙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바닥이 돌이면 머무를 수 없다. 그냥 위로 가는 거다. 이 상태로 지도자는 45일, 일반인은 7일 둔다. 그렇게 죽음을 두는 거다. 그렇게 해서 죽음을 확인하고 나면 영혼이 위로 올라갔다고 보고 소각하는 거다. 이 형식은 고구려 중기 5세기까지 진행된 것이다. 한편 피라미드 위에 고인돌이 있기도 하다. 이는 고구려의 형식이다. 고구려, 백제에 해당하며 신라는 내물왕 이전 까지 해당되는 방식이다.               




내물왕 이후의 신라는 사람들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기존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로 대체된 것이다. 이들은 흉노족이고 그렇기에 단 한 번도 개마무사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내물왕 때부터 신라는 왕릉이었다. 왕릉은 땅 위에 돌을 두고 그 위에 관을 두고 그 위로 봉분을 쌓은 것이다. 그나마 이 때는 땅 위에 관이 있었다.               




한편 고려 후기 부터는 땅 아래에 관을 두고 위에 봉분을 쌓는 지금의 무덤 방식이 사용되어다. 목관을 사용했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은 땅 속에서 고통에 잠기며 소멸된다. 그러다 보니 풍수사상이 도입되게 되었다. 흙 속에 있는 구조는 정신적으로 강제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회피방안이 마련되었다. 똑같은 형태인데 땅을 위쪽의 봉분보다 더 넓은 범위로 파고 그곳에 암석질 모래를 깐다. 그 중에 관을 놓고 그 위에 암석질 모래 부분 보다 작은 봉분을 쌓으면 영혼이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좋은 토질의 땅을 찾는 것, 하얀 암석질 모래가 있는 땅이 명당인 것이다. 근데 암석질 모래라 하더라도 황토랑 섞여 있는 게 일반적이다. 황토는 영혼을 잡는다.               




땅에 묻는 것에 비한다면 그나마 화장이 낫다. 화장은 쇼크는 있지만 그래도 자기 본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니깐. 화장 이후엔 뿌리거나 수목장하거나 봉안하던가 아무런 상관없다.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 구한말 그리고 지금까지 대략 700년 정도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근원적 자아가 그 땅에 다시 태어나기 힘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가진 육체적 권력,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꾀를 낸 것은 산 위에 묘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가야 사람들은 산 위에 봉분을 쓴 것이다. 신라는 평지에 봉분을 만들었고 가야는 산 위에 봉분을 만든 것이다. 가야 입장에선 하라니까 안 할 수는 없고, 산이라는 방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땅 아래 무덤을 쓰는 건 매 한가지다.     




세종 대왕은 어릴 적 관을 땅 아래에 넣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사람을 땅에 묻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있다. 사람을 땅에 묻는 것 자체가 아이고 지옥 가세요 하는 건데, 조선 사람들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세종 대왕은 문종에게 무덤의 설계도를 주는 방식으로 땅 속에 묻히는 것을 거부했다. 세종 대왕의 무덤은 땅 위에 돌을 깔고 수로처럼 물이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이 밀리지 않게 관 주변에 돌을 놓았다. 이 돌은 사각 기둥 형태가 아닌 팔각 기둥 형태로 돌을 다듬고 사각형을 만든 이후 그 안에 관을 놓았다. 그리고 봉분을 덮은 것이다.           




세종 대왕 묘가 기존 묘와의 차이점은 관이 땅 위에 있다는 것과 관 밑에 돌이 깔려 있다는 점, 관 옆에 돌이 있다는 것이다. 관 옆에 있는 돌이 팔각형인 것은 운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주의 세종 대왕의 무덤에는 1부터 9까지 숫자의 의미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 또한 여러 운명의 얽힘이 접목되어 있기에  도굴꾼이나 일본 놈들의 침입이 있었음에도 무사히 보전되고 있다.           




풍장이나 조장을 할 수 없는 지금, 현재 화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세종대왕의 무덤의 형태가 주를 이를 수도 있다. 가급적이면 돌로 봉분을 만드는 것이 좋다. 먼저 화강암 같은 돌로 바닥을 설치하고 관 주변으로 물길을 만든 후 돌방을 만든다. 그 안에 관을 놓는 것이다. 그리고 앞 쪽의 돌에 기록을 새기는 게 좋다. 그렇게 된다면 공원처럼 운영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윗돌에 틈을 만드는 게 좋겠다. 유리를 이용하거나 수정을 사용하는 방식을 택하면 영혼에게 혼란을 주지도 않고, 또 공기 유입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별빛과 달빛이 스며드는게 좋겠다.          




반면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체를 산 사람 곁에 두는 경우가 있다. 이는 정령 문화 때문인데 무덤을 사람이 사는 집의 방바닥에 만들거나 마당에 두는 형태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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