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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6. 2022

BC 2300, 고조선의 네트워크,초원길 북방교역로

한민족의 시작


북방교역로는 동쪽으로 이동한 한과 서쪽으로 이동한 하란 간의 정보와 물건의 소통로였으며, 동쪽으로 서쪽으로 자꾸만 길어졌다. 당시에 이 길은 초원 보다 숲이 더 많았다. 흑해에서 출발한 이 길은 고란을 거치고 바이칼을 지나 왕검성으로 이어졌다.     



 

한린 때는 바이칼이 종점 이었고, 배달 때는 아사달이 종점 이었다. 고조선 때는 왕검성이 종점 이었으나 왕검성이 함락 당했을 때에는 닝구르가 종점 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간엔 시키들이 있었다. 이에 이들로부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목책이 세워졌다. 목책은 수백 미터의 폭을 가지고 있었으나 길이는 수 킬로미터에서 십여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 이 방책은 아느의 후손이 사는 안전지대였으며 군사시설이었다. 성채는 숙박시설이며 보급로이기도 했으며 창고의 역할도 했다.     




성채와 성채 사이는 하루 정도 거리 였으며 목책 중간은 시키들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는 순찰대가 순회하고 있기도 했다.              




                         

엄청나게 많은 목책들이 동서 교통로의 안전지대 역할을 했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필요 물품을 목책에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조선 입장에서 영국의 아연을 가져오기 위해 직접 마차를 타고 영국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첫 번째 목책까지 가서 아연 1톤 필요해 라고 하면 그곳의 창고에서 바로 아연을 꺼내 주기도 했던 것이다. 없다면 목책 간 통신을 이용해서 아연을 보유한 가장 가까운 목책을 알려주기도 했고 또는 기다리고 있으면 가져다주기도 했다.          



          

북방교역로의 목책은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장정 몇 아름이나 되는 통나무를 그대로 세웠다. 높이가 20~30m에 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굵은 나무를 세운 상태로 벽을 이루고 있었고 그 주변엔 나무가 없었다. 주변의 나무를 베어서 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직경이 1m가 넘는 나무 벽이었기에 어떠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불을 붙여도 나무가 타지 않았다. 냉대 지역의 나무라 기름 먹인 불화살에도 살짝 타다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이 알래스카 개척할 당시 이 목책을 활용한 군사요충지, 토치카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토치카는 한 부대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목책으로 내부에서 식사와 숙박을 해결했으며 심지어 작은 구멍으로 내부에서 총까지 쏠 수 있었다. 과도한 짐작이지만 어쩌면 거북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초원길은 고조선이 성립한 기원전 2000년대 더욱 활성화 되었다. 그 정점은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500년 대이다. 비록 고조선 내부의 정치적인 지형은 바뀌었지만 경제적인 것은 더욱 풍성해 졌다. 동서 교역도 활발했고 목책들도 더더욱 안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원전 300년대가 합금문명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300년 경, 초원의 길이 막혀버렸다. 중간의 목책들이 시키 후예들에게 파괴되었고 중간의 도시였던 고란 역시 무너져버렸다. 중간 성채들이 피폐화됨에 동서무역로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후 왕검성이 침강되고 고조선이 망하면서 한나라의 세상이 되었다. 로마와 박트리아에 china 로 알려진 진나라의 군사무역이 서기 200년에 들어서면서 한의 염색비단에 의해 상업무역으로 진화되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중국은 ‘HAN'이 아닌 ’CHINA'로 남게 된다. 바로 이것이 비단길이다.     




초원길이 사라지며 비단길로 대체되면서 한민족이 가지고 있던 무역에 의한 부가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고조선 쇠퇴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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