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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5. 2022

BC 2300, 왕검성과 왕험성 사이 고조선의 공업지대

한민족의 시작

놀라지 마시라. 왕검성과 왕험성 사이는 공업지대였다. 얼마나 큰 공업지대가 있었는지.     



          

왕험성은 지금의 랴오닝반도 다롄시 인근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남쪽 40~50km 에 왕검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공업지대가 있었던 것이다. 공업지대와 왕검성은 지금은 바다 속에 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이 유적의 일부를 발굴했는데 금속파편들이 너무나 정교하기에 구한말 이곳을 점령했던 러시아 유물인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니다. 고조선의 것이다.



     

사용되는 소재는 세계 각지에서 공급되었다. 숯, 주석, 야철, 망간, 황토, 철, 갈탄, 은, 금, 구리 등이 중국, 마한, 부여, 동남아 등지에서 유입되었고 유황은 읍루 사람들이 공급했다. 읍루는 천지물이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로 부여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아연과 망간이 멀리서 왔다. 당시 아연은 동아시아에 광산이 없었다. 이에 북부교역로를 통해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 또한 망간을 찾으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당시 잠수함을 만들었던 이집트에서 가지고 왔다.     



           

한 때 잠수함으로 심해 탐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잠수함으로 수십미터 깊이의 바다에서 캐내온 망간이 초원길을 이용, 왕검성까지 공급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지역에서 자원을 가지고 오면 공업지구에서 이를 물건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다시 동아시아 전체로 배분되었다.        



       

고조선 전체 및 각국으로 퍼져나가는 고조선의 청동기는 규격의 표준화, 재질의 표준화가 함께 이루어진 상태였다. 당시의 운송수단인 마차를 예를 들어본다. 마차는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연결쇠가 규격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차는 전국을 누볐기에 만주 벌판이나 요동, 심지어 마한이 있는 한반도 서해안 어디에서도 고장날 수 있다. 나무야 새로 깎으면 되지만 연결쇠가 훼손되어 교체해야 한다면?     

     



개별 지역의 대장간에도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연결쇠 표본이 있어야 한다. 고조선은 전국으로 또는 인근국가로 두 가지를 전달했다.           




우선 표준시료이다. 망간, 아연 등이 잘 녹아있는 표준물질을 공급했다. 표준물질은 금괴처럼 괴의 형태로 전달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도끼 형태가 선택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에서도 동일한 물질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를 가공하는 방법이다. 도끼를 녹여서 마차의 연결쇠를 만드려면 가공방법에 대한 지식이 전수되어야 한다. 이는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지식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다른 표준물질이 선택되었고 표준물질 마다 가공온도와 가공방법이 달랐다. 가공온도는 연료로 사용할 나무종류와 풀무질 종류 등으로 조절되었다.       



        

고조선의 공업지대는 언제나 표준물질을 만드느라 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연기 역시 끊이질 않았고 그래서 신선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신선들은 왕험성과 왕검성 쪽으로는 오지 않으려 했고, 제단만 왕검성에 보관했다. 하지만 산 속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신선들은 자신만의 기다란 바늘이 필수였다. 개인의 성향차가 큰 것이라 제자인 랑에게 제작을 부탁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가끔씩 직접 공업지대를 찾아야 했는데 그 때 마다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공업지대 아래편에 있는 왕검성에서 업무를 봐야했던 단군의 직책은 신선들로선 선호하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제천행사가 없는 아사달은 조양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제천행사 때 각국의 참관자들은 최고의 물품들을 가지고 와서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시장은 조양에서 상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반면 교육의 역할은 왕검성으로 이전되었다.        



       

당시 제작한 청동기 유물을 보면 요즘 기계로 찍은 것 같다. 수많은 물품들이 규격 기준을 지켰고 이것들이 모여서 기계화되었던 것이다. 약 삼천년의 간격이 있는 조선시대(고조선 아님)의 철기 유물들과 비교하면 너무 수준 차이 난다.   



고조선 청동유물 마차부속


                 

예를 들면 성을 쌓을 때, 고조선 때는 돌과 돌을 놓고 돌에다 구멍을 파고 연결쇠로 고정 했다. 그런데 이 연결쇠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하나는 쇳물을 바로 부어서 돌끼리 고정하거나 다음으로는 공업지대에서 만들어진 표준 연결쇠를 꼽는 것이었다. 녹여서 하는 건 특수한 경우에나 시행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표준화된 연결쇠를 사용했다.     

          



그런데 조선 때는(고조선 아님) 돌과 돌 사이에 찹쌀죽을 부어서 붙였다. 그래서 성 하나 쌓으려면 쌀이 엄청나게 들어갔다.     

     



시대가 3000년 가량 지났는데 이게 뭔가?     

돌도 반듯하게 다듬지 못했다.          

          



고조선 때는 합금술이 가장 중요했다. 삼천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합금술이 사라졌다. 예를 들면 돌이라고 하더라도 화강암질 돌이냐 현무암질 돌이냐에 따라 그 돌과 대응하는 금속제가 달라야 한다. 항상 상극이라는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걸 이용하면 합금을 할 때 상보성과 상극성을 중요시 생각해서 만들었다. 누가 누구랑 친하고 누구랑 대립하느냐. 그래서 오행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여기가 화강암 돌이다. 화강암용 끌을 이용하면 정확하게 다듬는 게 가능하다. 현무암용용 끌을 이용하면 돌이 부서지거나 깨끗하게 다듬어지지 않는다. 즉 깍아야 할 돌에 따라서 사용하는 끌의 종류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 가지고 있는 합금 기술, 이건 굉장히 복합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이걸 기반으로 해서 만든 기술이기에 그냥 사람들 말로 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 안정된 체계적 사회에서만 전수 가능한 기술이다. 수십 명 또는 그 이상의 학생들 중에서 한두 명 정도가 전수할 수 있는 기술인데, 한반도에 엄청난 전쟁이 수두룩하게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헌원과 치우의 탁록대전을 첫 번째 전쟁으로 친다면, 지난 5천년간 993번의 전쟁이 있었다. 탁록대전은 100번의 전투지만 1번의 전쟁이며, 얼마 전 연평도 포격전은 전쟁으로 치지 않는다. 5년 마다 전쟁이 있었던 거다. 베트남 전쟁 이후 약 47년간 우리는 전쟁 없이 살고 있다. 비록 위기가 여러 번 있었으나 우리 역사 상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만약 625 한국전쟁이 다시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일이 년 전쟁도 아니고 사오십 년 전쟁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금의 반도체, 5G, 배터리, 자율자동차, 연료전지, 전기자동차, 제철기술, 원자력기술, 핵융합기술, 바이오기술, 석유화학기술 등 세계를 자랑하는 한국의 기술들이 과연 전수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고조선의 청동기 기술은 그냥 이거 할 때는 그냥 이거 때려서 하면 돼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그 안에서 상보성은 어떻고, 상극성은 어떻고, 음양오행 차원에서는 어떻게 해석/접목 해야 할 것이며, 금속과 유기물/무기물과의 관계성은 어떻고를 이해해야 하는 수준이다. 이건 경험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며 결국 자료와 데이터로 학습을 했어야만 하는 내용이다. 학습된 지식을 기반으로 다년간의 경험이 농축 되어야만 전수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료와 공장, 그리고 사람들까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조선 이후의 개마고원이 그나마 최근 것이니 개마고원을 빨리 발굴해야 할 것이다. 만약 개마의 유적을 찾을 수 있다면 아마 5만기 이상, 개마무사의 복장과 무구가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한편 아연은 구리, 철, 주석, 납보다 상당히 뒤늦게 홑원소 물질을 얻을 수 있었던 금속이다. 13세기 인도에서 아연 증기를 만들고 이를 증류하여 아연금속을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구리와 아연을 섞어 황동을 만들었다. 이 소식이 인도에서 유럽으로 알려졌고 1738년 영국 화학자 윌리엄 챔피언(William Champion)이 수백 년 전에 인도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증류법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아연이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았다. 8년 후 독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Andreas Marggraf)가 산화아연에 목탄을 섞어 환원하고 금속 아연을 얻는 방법을 발표했다.     

     



하지만 고조선의 청동기 산업화는 기원전 2300년대에 가장 융성했으며, 기원전 1000년대인 고조선 중기에는 청동기 기술문화의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조선의 기술 산업화 수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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