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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19. 2022

BC 2500, 호랑이와 곰, 마늘, 쑥 그리고 영고탑

한민족의 시작


곧 다가올 침략을 대비해야 했다. 왕검성을 완성하는 기원전 2333년에는 아직 시키들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마한이 마간 기준 마한강 너머에 몇 개의 군사 도시를 만들었던 것처럼, 치우가 마한의 번 맡았던 것처럼 왕검성을 지키는 번을 서쪽에 설치해야 만 했다. 왕검성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마한 전체를 방어할 수 있는 일정한 규모의 번을 세워야 했다. 바이칼에서 한웅께서 웅족을 택하여 시키들을 처단하는 결정을 했던 것 마냥 단군께서도 함께할 군사 세력을 선택해야 했다. 후보는 유목민족인 구려족과 부여족이다.     




유목민족과 달리 농경민족인 아사한에게 군사세력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 2가지 이다.      

1) 우리 민족은 잔인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백정을 혐오한 직업으로 여긴 게 그 사례다.

2). 당시 전쟁은 매우 잔혹했다. 찔러 죽이는 게 아니라 찢어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손에 피 묻히지 않는 전술을 일찍부터 개발했다. 바로 활이다. 당시도 지금도 활은 우리 민족성이다. 다연히 그 활이 포방부로 변경되었다, 직접 피 묻히고 딩구는 거 싫어하는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유목민족과 달리 농경민족은 채식이 기본이다. 생선과 채식을 기본으로 하고 정해진 날에만 육식을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물 죽이는 것을 싫어했다. 소와 같은 동물은 농업의 동반자로서 심지어 조선시대 (고조선 아님)에는 가축들조차 지금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등록제로 운영되었다. 심지어 도축을 하려면 지방 현령의 재판이 있어야 가능하기도 했다.               




찢어 죽이는 것에 대해선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시키 만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황토고원에서 출원한 회화족이 자꾸만 덤벼들었다. 용병을 구해야 했다. 목축을 하는 유목민이 대안이었고 구려족과 부여족을 후보로 두었다. 비록 부여족은 아느에서 온 민족이긴 하나 겉으로 보기엔 유목민으로서 구려족과 다를 바 없었다.  소와 양을 모는 게 구려족이고 양과 염소를 모는 게 부여족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구리다~ 라는 말이 있듯이 구려족은 냄새가 심했다. 여기서 구는 냄새난다 라는 뜻이며 려는 땅, 영토라는 뜻이다. 징기스칸의 조상인 그들은 ‘우리는 천손이다’ 라는 뜻을 지닌 ‘몽고’라는 말이 만들어 지기 전까지 구려족이라 불렸다. 무엇보다 구려족은 배달 한웅 때 함께 시키들을 처단했던 종족이다. 한웅은 웅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 온 이후 많은 유목민족들을 군사로 활용하였다. 구려족이 단군을 도우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려, 제, 라 약간씩 다르긴 하나  모두 영토를 의미한다.)




처음엔 구려족을 데려와 교화를 시키려 했었다. 동진하는 회화족을 막기 위해서는 땅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정처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을 한자리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구려족은 그게 불가능했다. 또한 제천행사에 참가시키려면 깨끗이 씻어야 했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마치 고양이 씻기려 할 때 기겁하는 것 같았다. “알겠다 너희들 가라 가” 감히 천족에게 대들 수 없었던 그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하지만 부여족은 달랐다. 구려족과 부여족이 사는 지역은 둘 다 엄청 추웠다. 하지만 부여족은 얼음을 깨어 목욕을 했고 얼음이 없으면 식물이나 모래를 빻아서 몸에 문질렀다. 나뭇껍질을 벗겨서 잘게 문지른 후 안쪽 부드러운 부분을 밖으로 나오게 해서 그걸로 몸을 청결히 했다. 그렇게라도 목욕을 했다. 지금의 때밀이가 부여족에게서 유래 되었다라 해도 크게 틀리진 않으리라.           




한편 아느 에서는 아침마다 찬 물에 몸을 씻는 게 일상이었다. 수산화칼륨이 포함된 돌을 이용해서 몸을 씻을 때 사용했다. 지금의 비누 같은 셈이며, 지금도 터키에는 그 잔해가 남아있다.     




더욱이 부여족은 비단옷을 입었다. 그들은 아느로 부터 누에치기를 배웠고, 아느의 여사제, 린에 의해 보호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흰색 비단에다가 백금 실선을 넣는 걸 좋아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족 처럼 보였다. 피붓빛도 하얗고 단지 머릿결이 흑색이란 것만 달랐다.     




부여족은 아느의 북쪽에 살던 아느계 사람들이였다. 루의 방계 혈통이다. 하지만 시키들의 피가 섞여 있는 아느 말기의 루와는 개념이 다르다. 보통 루는 아느 후기 사람이다. 하지만 부여는 아느 전기 사람들이다.      




카스피해 남쪽에 고원이 있었고 고원의 윗편과 아랫편에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아느 사람들이 되었다. 북쪽에 살던 이들이 부리족으로 이들이 부여족이다. 이들은 아느에 의해 지식과 문화가 전파되면서 문명을 발달시켜 왔었다. 아느 멸망 후 린에 의해 이들은 동쪽을 이동했다. 린은 여신의 후보생으로 린에게서 비단을 짜는 법을 배웠음은 물론, 아느가 기를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었던 것처럼 부여는 린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었을 정도이다.          



부여족의 왼편에는 카스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켈트족이 살았다. 켈트족과 부여족은 기원전 8000년에서 3000년 사이 지속적인 교류를 했었다. 켈트족에는 부여족 피가 있었고 부여족에는 켈트족 피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민족 중에 코도 좁고 약간 서양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있다. 남자들의 경우 귓불이 강한 것도 특징이다. 이들이 바로 켈트 혼혈 부여족의 후손이다. 켈트족과 아느는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시기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부여에 전파된 아느의 지식/문화가 켈트족에게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시키들은 자신들이 가장 우월종이길 원했다. 이에 아느 사람들은 절대 죽여버려야 했다. 하지만 나머지 종족에 대해선 상황에 따라 살육했다. 부여족은 루였기에 시키들의 입장에서 굳이 도륙할 필요는 없었다. 이에 식량 등 원하는 것을 내어주면 되었다. 하지만 린을 중심에 두고, 피신했던 아느 사람들을 보듬었던 부여였기에 안전하지 못했다.




결국 켈트족은 서쪽으로 부여족은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두 종족은 단번에 동쪽 끝으로 이동했던 마그들과는 달리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듯 서서히 이동을 했다. 부여족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먼저 바이칼 쪽으로 이동한 다음 기원전 2550년 경, 처음으로 북만주에 도착한 부여인들은 100여년에 걸쳐 모두 이동할 수 있었다.          




부여족이 북만주로 넘어온 지 200년이 지났을 때, 이들은 인구가 굉장히 늘어났다. 또한 신전을 중심으로 린을 숭배하고 비단을 생산했던 부여는 중앙부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군사를 두었다.           




결국 이들 부여족이 고조선의 서쪽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들 부여족이 만든 나라가 상나라이다. 그리고 상나라는 나라가 아닌 군사조직이다. 적과 대치하는 전방의 진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후방세력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 내용이 호랑이와 웅녀가 동굴 속에서 100일간 마늘과 쑥을 먹으며 기다렸다는 설화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웅족과 결합은 총 2번 했다. 바이칼에서 한번, 고조선 때 한번 이다.          




한편 부여의 주택은 1층에 닭과 돼지가 살고 2층엔 사람이 사는 형태로 발전했다. 추위가 심한 북만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자 해충들의 안식처가 만들어 진 셈이 되었다. 특히 뱀과 돌지네가 위험했다. 이에 닭과 돼지를 집 안으로 들였고, 훈훈한 집으로 모여든 벌레들을 효과적으로 처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곧 널리 퍼졌다. 한반도를 넘어 제주도, 폴리네시아까지 전해졌다. 지금도 제주도의 흙돼지가 그 흔적이다.





이를 글자로 나타낸 게 家(가) 이다. 한자에 있어 기본어에 해당하는 것들이 여와 복희를 통해 회화족으로 전파된 것 중 하나다. 당시 회화족은 땅을 파고 집을 지었다. 家(가)자와 전혀 관계 없는 주택을 갖고 있었다.     




당시 돌지네는 팔뚝만 했다. 진짜 큰 놈들은 구렁이 보다 더 컸다. 어린애들이 돌지네에게 물리면 나타나는 증상이 발육부진인데 심하면 난쟁이가 되었다. 돌지네에게 물리면 썩게 된다. 돌지네는 부패된 걸 먹는 습성이 있는데, 돌지네 내부는 산성이다. 병원체가 들어와도 그 안에서 다 죽어버린다. 걔들이 물고 나면 안 움직이고 썩게 된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금도끼 은도끼>    네이버


금도끼 은도끼의 배경은 부여다. 블라디보스톡 위쪽, 항카호를 중심으로 부여의 신전, 닝구르가 있었다. 항카호는 부여의 삶의 배경이었고, 금도끼 은도끼의 연못은 실제는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있어 금은 왕권을, 은은 재산을 의미한다.                             





항카호는 약 4200km^2 으로 제주도의 두 배, 전라북도의 절반 크기이다.           





부여는 그들이 지녔던 지식, 기르를 항카호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 곳을 닝구르라고 했다. 닝구르를 한자로 표현하면 영고탑이 된다. 땅 속은 닝구르이며 바깥에는 구조물이 세웠고 이를 영고탑이라고 했다. 영고탑은 당시에도 관광지였고 일반 건물이었다, 닝구르를 수호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당시에도 닝구르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영고탑은 발해 때에도 관리되었다. 발해가 가진 5개 수도 중 하나였다.     




우리가 아느에서 가져온 기르는 바이칼, 아사달, 왕검성, 닝구르에서 보관되었다. 그런데 아사달은 홍산문명이란 이름으로 파헤쳐 지고 있고 왕검성 또한 현재 중국의 손에 있다. 얼마전 왕검성의 일부 유적이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적이 있는데 왕검성은 너무나 거대한 성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찾는건 쉽다. 왕검성에 대해선 또 어떤 억측을 할지 염려된다. 동북공정의 또 다른 전개에 주의함은 물론 바이칼과 닝구르에 숨겨진 아느의 유물을 조속히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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