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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임 Jan 21. 2022

BC 2333, 삼화론, 삼한의 성립

한민족의 시작

배달은 정해진 곳에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 유목민에 가까웠다. 앞에서도 짚었지만 농경사회가 기본이다. 배달은 그냥 계절 따라 이동하는데 이번에는 저리로 갔다가 이번에는 이리로 갔다가 그냥 그랬다.  


   

그럼에도 산둥에 치우를 보냈던 이유는 산둥 내부에 있는 사람이 아느계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산둥은 대륙과 접한 입구가 숲이었고 숲 너머 있는 사람이 마한의 후예임을 알았다. 치우는 처음엔 일종의 대사관이었다. 마한의 후예들은 전쟁의 개념도 잘 없었다. 이에 반해 배달은 적극적으로 싸웠던 전사들이었다. 보호가 필요함을 알았고 그래서 치우가 군사령관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배달의 중심은 바이칼이었다. 그 와중 성스런 땅을 발견했는데 거기가 아사달이었고, 그곳에 높지 않은 언덕과 큰 나무를 발견했다. 그 나무가 신단수였다.    


  

자꾸 이동하니깐 그 나무 밑에서 주기적으로 모이자고 했다. 그게 기원전 6천 년 대이다.     



여기에 모였다 헤어지면서 각각의 행적을 표시했다. 바위를 이용해 자신이 갈 곳의 방향과 거리를 표시했다. 각자를 상징하는 표식은 달랐다. 결국 신단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비석들이 비치되었다. 어느 순간 신단수를 보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언제 모여야 할지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 주변에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구조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와 동일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게 유럽의 스톤헨지다. 이렇게 환웅의 신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동족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거기에 모여서 교역하는 시장이 모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모임과 교역장을 나눠야겠다 싶어서 교역은 조양, 아사달은 아느계 사람들만 모이는 비밀 회의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단 조양은 현재 북경시에 포함되었다. 조양이라고 별도로 있는 도시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과거의 조양이 북경시로 남게 된 거다.



그렇게 있는데 기원전 2500년이 되면서 부여족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부여족이 이동한 가장 큰 이유가 기후변동이다. 기후변동으로 인해 바이칼이 얼어붙은 것이다. 그래서 바이칼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두 파벌로 나뉘었다. 매파와 비둘기, 강경파와 유화파처럼 나뉜 거다. 강경파는 바이칼에 머물렀고 유화파는 아들을 따라 아사달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제 유목 말고 정착하자라고 해서 아사달을 새롭게 만들었다.     




기후 변동으로 이동하며 부여족들은 북만주에 정착했다. 기원전 2500년대, 이미 아사달은 큰 도시가 되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게 순혈주의와 혼혈주의/포용주의가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한린 때부터 이어진 순혈주의는 산으로 갔다. 신선이 된 것이다. 혼혈도 인정해야 한다 라는 사람이 부여를 인정했고 아사달을 이뤘다. 그래서 한웅을 서자라 표현한 것이다.     




혼혈을 인정해야 한다 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느이면서 혼혈인 사람은 인정, 하지만 원주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자들로 구분되었다. 원주민도 인정하자 와 안된다 원주민은 인정하지 못한다 로 나뉜 거다. 난리였다.   



  

원주민은 인정하지 못한다 가 호랑이 파고 원주민도 인정하자 가 곰파이다.     




기원전 6천 년대 바이칼 곰파와 기원전 2500년대 백두산 곰파로 두 개, 두 번의 곰파가 있는 거다.


    

아사달로 내려온 직후 바로 나라를 못 세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떡할 거냐. 순혈만으로 나라 세울거나 주변의 쓸만한 부족 포용할 거냐      

그러면서 이제 지도자로 떠오른 단군왕검이 나는 포용하겠다라고 주장했다.

포용하고 교화시켜서 그 사람도 우리처럼 정신 수준을 높이겠다. 그게 삼화론이다.    



 

그렇게 하면서 고조선이 만들어졌다. 한 100년 정도 걸렸다.     



 

환웅의 곰과 단군의 곰은 다르다.     

환웅의 곰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이고,

단군의 곰은 포용과 배척을 나타내는 거다.     




그 안에서 순혈만 하겠다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여기저기 섞여 있을 것이다.     




각자 생각해 보라. 와족 인정할래 안 할래?     




와족이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맥족과 예족을 말하는데 맥족은 한반도, 만주의 산속에서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며 예족은 둥글게 생긴 사람들로 한반도 산골에 있는 우둔한 자들이다. 아느의 후예가 이 땅에 오기 전 한반도에 살던 원주민으로서 와족의 인구 밀도가 일본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다.



일본은 다수 와족이 사는 삼도에 아느계 후예가 일부 유입된 곳이며


한국은 다수 아느계 후예가 사는 땅에 극소수 와족이 일부 존재하는 곳이다.  






당신은 와족 인정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와족을 인정할 수 없다면 호랑이파가 되는 것이며,

외부에서 이민자들도 받아들이고, 중국인, 일본인 유입되는 것도 허용하자는 입장은 곰파인 것이다.  



   

근데 이겼던 것은 곰이다. 그래서 단군이 웅족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철학적인 것이다.



     

그냥 귀화해서 저도 여기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들어와서도 본국의 문화를 유지하겠다 와

 이 땅에 왔으니 당신들 문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게 정치와 철학의 차이다.     




지금 외국인들 들어와서 귀화해서 사는 것..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없다.



     

기준이 되는 게 교화가 되냐 안되냐이다.     



교화의 대상이 되냐 안되냐로 받아들이냐 아니냐를 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체제가 상당히 복잡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수 없이 많은 역사 동안 그런 기준의 차이 때문에 나라가 갈라졌다.     

부여와 옥저가 나뉜 것도 결혼할 때 남성 중심으로 볼 거냐 여성 중심으로 볼 거냐로 나뉘었으며,     

예전 조선시대 예송논쟁,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모두 사소한 차이들 해석 때문에 나뉜 거다.    



 

큰 주제에 대한 것을 모르니까

작은 주제에 매달리게 되었다.     




또한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는 문제다.  



   

우리가 잡아야 할 개념은 바로 삼화론이다.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는 거다.



천부경에 답이 있다.

홍화 돈화 광화     



     

그렇게 삼화론을 중심에 두고 우리 민족이 따로 또 같이 모인 것이 삼한이다.


마한, 부여, 고조선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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