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하늘

두근거림

by 봄날

은하는 미술 시간을 좋아했다.

떠오르는 대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서, 다른 수업시간에 비해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굳이 누가 더 잘하고 말고 가 없어서. 적어도 그전까지는 그래 왔다.

별생각 없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크레파스로 산을 그리고, 나무도, 꽃도, 흐르는 강물도 그렸다. 강물에는 물고기도 있어야지, 하늘에는 구름 한 점과 방긋 웃는 해님도 표현해보았다. 해님은 노란색, 구름은 회색, 하늘은 당연히 하늘색. 강물은? 아, 선생님께서 바탕은 물감으로 해보라고 하셨지. 은하는 그제 서야 물통에 물을 채우려고 일어섰다. 일어서다가, 윤기의 스케치북을 보게 되었다. 윤기의 그림은....


멀리 산이 보이는 호숫가였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다홍빛, 아니 주황빛에서 보랏빛으로 퍼져 나가는 하늘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풍경이 생생했다. 은하는 그때 알았다. 하늘은 하늘색만이 아님을, 세상에는 낮과 밤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해 질 녘 풍경에는 색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빛이 섞여 있음을. 은하는 보랏빛 하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하의 시선을 느낀 윤기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순간 은하의 볼이 달아올랐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윤기의 그림에 비해 너무 단순하고 초라한 자기 그림이 창피해졌다. 뭣보다, 윤기가 그런 은하의 모습을 다 눈치챘을까 걱정이 되어 얼른 돌아섰다.




어릴 때,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보내준 학원은 주산학원이었는데, 사실 그곳은 부부가 한 공간을 둘로 나누어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남편은 미술을, 부인은 주산을 가르치는 시스템이었다. 어느 날 학원에서 야유회를 간다고 했다. 은하도 신이 나서 따라나섰는데, 미술 학원 선생님이 모두에게 화판을 하나씩 나누어 주시고 그리고 싶은 풍경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짙은 눈썹, 우수에 빠진 큰 눈의 선생님은 다정하게 웃으며 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은하라고 했지? 그림을 제법 잘 그리네?”

부끄러워 한없이 몸을 배배 꼬기만 했던 어린 날의 은하는 집에 돌아와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도 주산 말고 미술 학원 다닐래.”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던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산이 훨씬 쓸모 있고 중요한 거라고.



은하는 물통에 물을 채워 자리로 돌아왔다.

“너, 미술 학원 다니냐?”

괜스레 퉁퉁거리며 윤기에게 물었다.

“하, 네가 보기에도 내 그림이 좀 멋진 거지?”

으이그,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또 잘난 체하기는. 은하는 쏘아붙이고 싶은 말을 눌러 담았다. 그때 좀 더 강력하게 엄마를 졸랐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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