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

바람은 불고, 아이들은 자란다

by 봄날

노트북 화면에 하얀 백지를 띄워놓고 앉았다.

일주일 내내 숨 막히게 바쁘고 지쳤던 마음을 고요에 맡기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은 기필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리라, 모두 내려놓고 내 마음자리를 돌아보리라, 노트북을 챙겨서 집을 나서는 주말,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상쾌했다. 밖은 바람이 불고 해가 쨍한데 나는 책방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성하게 영근 수국 꽃송이는 조금 버거운 듯 고개를 숙이고, 목이 긴 보라색 꽃가지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아, 이토록 평화로운 순간이라니.


지필평가가 끝나고 난 이번 주는 논술형 문제 채점과 성적 확인, 수행평가 안내, 수업 준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반면, 아이들은 다음 주에 있을 체육대회에 대한 기대로 붕붕 날아다녔다. 학교 전체가 들썩들썩, 반마다 단체복을 주문하는 문제로 충돌이 일어나고, 간신히 찬성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이번에는 어떤 옷으로 정할지에 대한 취향 차이로 분분하다. 어떤 반장은 담임에게 찾아와 미주알고주알 고충을 털어놓고, 어떤 반장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키고 나서는 담임에게 통보를 한다. 교사들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맞출 필요가 있겠냐고 설득해보지만, 아이들은 이번이 학창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티가 될 테니 꼭 하고 싶다고 졸라댄다. 부모가 자식을 이길 수 없듯, 교사도 아이들을 이길 방도가 없다.


금요일에는 체육대회를 위한 축구 예선전이 있었다. 반 대항 축구 경기는 남학생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몸싸움을 벌이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고 누구 때문에 이겼네, 졌네, 하면서 경기 이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아서 담임교사 입장에서는 늘 걱정이 앞선다. 경기 전에 준비운동을 철저히 할 것과 이기려고 욕심내서 무리하지 말고 다치지 않게 ‘살살’하라고 당부를 하는데 한 아이가 톡 끼어들어 말한다.

“샘, 우리 반 공부 못한다고 포기하신 거죠?”

평소에도 우리 반 아이들이 학습 의욕이 부족한 것에 대해 투덜대던 녀석이다. 불쑥 끼어드는 태도와 그 말에 화가 올라왔지만, 꾹 내리누르고 말했다.

“OO아, 밉게 말하지 말고, 예쁘게 말하자.”

“네.” 샐쭉한 표정이 다 보이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점심시간, 상대 반 담임교사와 나란히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각각 “O반 파이팅!”을 외치며 경기에 몰입하려 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하다. 경기 초반부터 이기려는 의욕으로 날아다니는 상대 팀 아이들과는 달리, 마지못해 뛰고 있는 느낌이랄까. 결국 상대 편에서 먼저 두 골을 넣었고, 의욕을 잃은 모습들이 역력해졌다. “괜찮아, 힘내!” 소리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국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 외의 것들로 칭찬을 받을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공부가 부족한 이 아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자존감을 깎아 내는 말들을 많이 들었을까, 혹여 학습된 무력감으로 모든 일에 성취욕구를 미리부터 차단당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뛰어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여 한 골을 넣었다. 지켜보던 나는 한시름을 놓았다. 그래도 2대 0으로 지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아이들을 격려했다.

“잘했어.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된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속상했다. 수학은 무리라고 말하는, 이번 시험성적도 과히 좋지 않은 우리 반 아이들이 체육대회라도 이겨서 학교생활에 흥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라고 없었겠는가.

“선생님, 저 아까 경기 끝나고 올라와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났어요. 너무 분해서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열심히 뛰었던 아이라 나도 덩달아 마음이 찡했다. 열심히 한 만큼 속상한 마음도 클 것이리라.


교무실로 돌아오니 옆 반 선생님이 경기 결과를 묻는다. 우리 반이 졌어요, 했더니 다들 함께 아쉬워하는데 M선생님이 말한다.

“선생님, 근데 재민이가 선수로 뛰는 모양이더라고요?”

M선생님은 재민이가 1학년 때 담임이셨던 분이다.

“네, 열심히 뛰다가 발에 상처가 나서 보건실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와, 선생님, 재민이 작년에는 아무하고도 말 안 하고 학교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아이였어요. 장족의 발전이네요.”

“아, 정말요? 2학년이 되고서는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수업 시간에도 나름 해보려고 하는데요. 공부를 조금 어려워하긴 하지만요.”

“그러니깐요. 작년에는 수업 시간에도 엎드려 잠만 잤었는데, 얼마 전에 복도에서 만났는데 자기 요즘 수학 공부도 한다고 자랑하더라고요.”


M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속 먹구름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아이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라는 오래된 문구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절대 그 순간의 모습으로 아이를 단언하지 말 것, 믿고 기다려주는 노력을 멈추지 말 것, 그런 다짐들을 되새긴다. 아이들은 나름의 속도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음을, 어른이 보기엔 아주 미미한 변화일지라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배우고 있음을,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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