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세요

말하는 연습

by 봄날

"사과하세요!"

화살이 시위를 당겨 은숙의 뇌리에 박힌다.

"뭐라고?"

"저한테 사과하시라고요."

차라리 잘 못 들은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숙은 주변 선생님들의 놀란 표정들을 살피며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실감한다.

"내가 왜?"

짧게 묻는 은숙의 목소리가 잠깐 떨린다.

"선생님이 제 몸에 폭력을 쓰셨잖아요."

뚫어져라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이 본인이 다니는 학교의 교무실임을 알고도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뱉어낼 수 있는 것일까? 무섭도록 몸서리가 쳐진다.


"오해가 있나 본데, 선생님은 네가 수업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으니까 계속 방치할 수가 없었어. 깨우려고 살짝 건드린 걸 폭력이라고 말하는 거야?"

숙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이의 공격은 다시 시작된다.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잖아요. 제가 폭력으로 느꼈다고요."

숙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너도 수업태도에 대해서 나한테 사과해야 할 것 같은데?"

"네, 사과드릴게요. 선생님도 저한테 사과하세요."

이렇게 되면 피차 감정싸움이 된다. 교사도 학생도 똑같이 유치해지는 신경전. 승자도 패자도 없는 난투전.


"oo아, 선생님이랑 나가서 얘기하자."

뒤늦게 들어온 담임선생님 손에 이끌려 아이가 나가지 않았다면 모두가 불편한 상황이 길게 이어질 뻔했다. 나를 포함한 여러 선생님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뒤끝이 씁쓸하다. 요즘 아이들의 당돌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세대차이일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하는 고민에 한숨만 깊어진다.


사실 교직에 있으면서 더한 장면도 많이 보았다. 담임교사에게 "또 시작이네. 지랄." 껌 뱉듯 한 마디를 던지고 교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던 녀석이 작년에 한 명 있었다. 그보다 훨씬전에는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에서 담임교사에게 쌍욕을 퍼부었던 녀석도 있었다. 반 아이의 욕 앞에 무방비로 당했던 선생님은 일 년 내내 갖가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며 교무실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 아이들에게 어쩌면 더 크고 깊은 상처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지만, 교사도 사람인지라 상처받고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은 누가 알아줄까.



(사람 많은 호프집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사과하세요." 소리가 들려오면)


기정 - 저 말 저만 불편한 거 아니죠? 회사에서 어떤 조사원이 나한테 사과하세요, 이러는데 심장이 막 쿵쾅거리면서 말문이 막히는데... 내가 뭐 잘못했지?


태훈 - 나 기분 나쁘다, 너 잘못했다, 뭐 거기까진 말할 수 있어요. 근데 사과하세요는 논쟁의 여지를 틀어막고 그냥 결론 낸 거잖아요. 난 피해자, 넌 가해자.


기정 - 그죠. 그거죠. 아니 그 말 듣는데, 그냥 막 사형선고받고 구덩이에 떨어져서, 시멘트까지 부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그 정도로 나쁜 사람 된 것 같아서, 밤에 한 숨도 못 자고, 근데 히트는 그다음 날 제가 사과했다는 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태훈 - 착하시네요.


기정 - 그 여자가 아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말에 얼마나 당황하는지. 사과하세요가 무슨 신종 싸움의 기술이에요?


태훈 - 옛날의 사과는 참 멋진 행동이었는데. 그죠? 어떤 한 인간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용기 있게 하는 행동이 사과였는데, 언제부터 사과가 강요에 의한 비굴한 행동이 돼버렸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이 장면에서 일시 정지상태가 되었다. 저 말에 상처받는 느낌은 나만이 아니었구나, 내가 꼰대라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 말의 폭력성 때문이었구나, 누군가를 쉽게 가해자로 결론 내리는 어법이 문제였구나, 생각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비단 내가 만난 학생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어법 대신, 어떤 점이 어떻게 내게 불편했는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할 듯하다. 그런데 그건 누구에게서, 어떻게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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