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4. 2023

굿바이 여고동창

< 내가 그녀를 만나지 않는 이유 >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다시 만나 반가웠던 친구가 있다. 여고 시절 동창이니 20년도 더 돼서 만난 것이다. 어쩌다 연락이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친구는 내 연락처를 확인하고는 한달음에 내가 사는 곳으로 달려왔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지만 친구는 그 시절의 외모를 상당 수준 유지하고 있었다. 몸매도 그대로였고 헤어 스타일도 똑같아서 한눈에 망설임 없이 이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분홍색으로 정장을 아래위로 차려입고 나왔는데 친구를 만나러 왔다기보다는 무슨 미술 전시회에 초대받은 사람 같았달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왔는데 그에 비해 나는 너무나 성의가 없었기에 미안할 정도였다.      


우리는 한적한 카페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를 마시고 근사한 브런치도 먹고 거의 해가 질 무렵까지 한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는 자신이 사는 곳, 딸내미 학교, 남편의 직업 등을 비롯해 여느 아줌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 듯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      


신기한 건 딱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빼놓고 자신의 역할과 환경에 대해서만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사실 지난 시절에도 동창생들과의 만남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워커홀릭이었다. 만나봤자 잘된 친구, 못된 친구 할 것 없이 괜한 험담이나 하게 되고 자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 남편이, 우리 시어머니가, 우리 딸이, 내 동생이 하면서 나는, 내 생각은, 내 계획은 따위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가 정말로 싫었다. 이상하게도 똑똑한 친구들 마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너는 그걸 하고 싶어?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나야 뭐, 하고 얼버무리는 식이었다.      


분홍 정장의 친구는 조심스레 방송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우리 반 반장의 소식을 들었냐고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즈음 반장 친구와 연락이 닿아 조만간 만나자고 하던 때였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소식은 역시나 불행의 뉴스였다. 남편이 연예인과 바람을 피웠는데 교회에 소문이 다 퍼져 나오지도 못한다고 말이다. 반장 친구는 학교 육성회장의 딸이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6년간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리 학교의 얼굴이었다. 학교 다닐 땐 얼굴도 하얗고 미인인 데다가 키도 크고 음악, 체육, 미술까지 잘하던 넘사벽 존재였다. 그랬던 친구의 불행을 인생의 몰락으로 평가하며 신이 나서 나의 맞장구를 기다리던 분홍정장 친구에게 나는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걸 아직도 몰랐냐고 하는 분홍친구는 마치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알리려고 온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나 역시 분홍 이를 만났던 시기에 내 코가 석자라 모든 것이 좋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사실 분홍이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별로였던 아이였다. 시험을 치면 등수가 기록된 용지를 한동안 벽에 붙여놓았던 잔인한 시절, 분홍이는 끝에서 몇 번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분홍이는 아마 자기보다 한참이나 월등했던 반장 친구가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못하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래도 자신보다 반장친구와 더 가까웠던 나를 통해 무언가를 더 확인받고 싶었던 것일까.      


분홍이는 무용을 전공하게 된 딸내미의 예쁜 사진을 보여주며 연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자랑을 했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분홍이는 모델로 나가면 성공할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새침하기만 했던 그녀는 수다쟁이로 변했고 나는 그녀의 수다가 끝날 때까지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선생님과 친구들 이야기를 나누었음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굳이 먼 곳에서 나를 찾아와 준 친구의 성의도 고맙고 우리가 기억하는 서로의 가장 예쁜 시절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어쩐지 기분이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 다시 만나야 할 이유도 별로 없고, 연락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 사이 공통의 화제는 더 없다는 걸 확인하며 돌아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험담을 하며 시간을 공유한 만남은 더는 기억하고 싶지가 않다. 분홍이도 같은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돌아가 괜한 이야기를 꺼낸 자신의 못난 심사를 후회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로 반가운 사람이라면 둘 다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여고시절처럼 둘만이 아는 비밀이라도 공유한다는 어린 마음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 만나서 관계가 좋게 이어질 수 있다.      


미적지근한 태도로 험담에 동참한 나는 분홍이 동창과 안녕했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 두 사람은 그 후로 몇 년 동안 똑같이 약속이나 한듯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고 싶은 만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