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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4. 2023

언젠가는 굿바이

< 천불이 내려 앉아요 >

알려졌듯이 갱년기는 폐경과 관련된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겪는 시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갱년기는 사실상 이미 시작된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다만, 스스로 인지한 채 원인과 결과를 매치하며 살지 못해서 그런지 몸과 마음의 변화가 갱년기 때문이라고 여기진 않았던 것 같다.      


먹고 사느라 너무 바빴다.      


그러나 올해부터 사람들이 언급하는 그 증상들이 나도 자각할 정도로 뚜렷해지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천불 : 하늘이 내린 불이라는 뜻으로, 저절로 일어난 불을 이르는 말.     


처음으로 천불 할 때 천자가 하늘(天)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뜻을 알고 나니 더욱 무슨 형벌로 생각된다. 나는  먼저 아침에 올라오는 천불을 다스리기 위해 생약 성분의 호르몬 약을 먹었다. 돌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침이 되면 가스레인지 앞에서 천불이 올라온다고 하신 기억이 난다. 한번 올라온 천불은 두어 시간 내려가지 않고 모든 걸 뜨겁게 만들었다.      


누가 일부러 나 화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천불이 올라온 다음부턴 누구라도 그렇게 짜증이 날 수가 없었다. 누가 말 거는 것도 싫고, 누구에게 말 걸기도 싫고, 두 번 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누가 되었건 근처에 오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면 피해자로 유력한 인물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날 아침도 계란 프라이를 하겠다고 프라이팬에 가스 불을 올렸더니 그 불꽃이 마치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순간 열이 확 하고 오르는데 하필 계란을 프라이팬 날 쪽에 정확히 조준하지 않아 그만 프라이팬 옆구리를 타고 적당량은 바깥으로 나머지는 안쪽 벽을 타고 모양새가 엉망이 된다. 마음이 급하니 아직 덜 익은 게 분명한데 반쪽만 뒤집다가 나머지는 그대로다. 이리저리 뒤집다가 오믈렛도 아니고 결국 형편없는 계란 주물럭이 된 것 같아 남편 것은 다시 하려고 엉망 된 프라이는 내 입으로 가져간다. 아차, 그렇게까지 뜨거울 줄은 몰랐는데 입천장이 덴다. 가슴에서 시작한 천불은 이제 활활 타올라 머리끝까지 거대한 불꽃이 된다. 그러다가 이렇게 간단한 계란 프라이 하나 몇십 년을 부쳤는데도 이 모양인가 싶어 자책모드로 들어간다.  젠장할. 빌어먹을. 사실 이보다 더한 욕이 튀어나온다. 


갑자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히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도시락까지 싸대신 엄마가 떠올라 괜스레 울컥하기까지 한다.  이제 겨우 계란 하나 해결했는데 도저히 국은 못 끓이겠고 그냥 오늘 아침은 건너뛰었으면 좋겠다.  슬며시 뒤에 다가온 남편이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는데  괜찮아라고 해주기 싫어 가까이 오지 마하면서 신경질을 내버린다.     

 

남편은 숨을 고르고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약을 하나 사 왔다. 심각하게 상담하고 사 온 것이라 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먹으라고 한다.  두어달째 먹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효과가 좋아 아침 천불은 확실히 좋아진 것 같다.      


그런데 그거 하나 해결했더니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민이 생겨버렸다. 언제부턴가 운동하면서 땀이 과하게 터진다는 점. 한여름에도 땀이 없어 늘 염소라고 불리던 내가  실내운동 한 시간 만에 아무리 에어컨을 틀었어도 속옷은 비틀어 짜도 될 만큼 젖어버린다.  그래서 항상 속옷이고 겉옷이고 충분한 여분을 가지고 다닌다.  다행인지 땀은 운동할 때만 과하게 터져서 아직 뚜렷한 대책은 마련하지 못했다. 

    

여하튼 무언가 달라진 나를 느끼며 하루종일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점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나보낼 나의 갱년기에 대해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꼼꼼히 이별준비를 할 작정이다. 곧 차일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차버리고 마는 그 옛날 못된 아가씨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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