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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7. 2023

나 혼자 먼발치서 안녕

< 알고 싶지만 듣고 싶지는 않아 > 

어느 날인가 신문을 보고 내가 알던 지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는 지인의 부모님이 사망했다는 기사는 많이 보았지만 지인 당사자는 처음이었다. 이제는 인연도 희미해져 알았다고 한들 행동으로 옮기기는 뭐 한 사람이었다. 그땐 신문에 몇 줄 부음기사라도 실리려면 살아생전 업적이 있거나 해당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이어야 가능한지 알았다. 부음기사도 광고라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돈만 내면 누구라도 죽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일상이 바뀌거나 생활이 달라진 건 없었다. 어제까지도 연락 않고 잘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오늘 죽었다 한들 새삼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한 달, 두 달, 계절이 바뀌었는데 나는 무언가 정리가 되지 않은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차츰 병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비밀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나는 그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살아 있는 동안 한 번은 만나보길 원했던 것이다. 그냥 막연하게 꼭 약속을 하지 않고서라도 나 혼자 먼발치서 보고는 싶어 했던 것이다.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젠 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현실을.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시기를 정리하고 막을 내려야 했다. 아니 이미 내려진 막을 깨닫고 종결된 관계를 인정해야 했다. 사실 나는 그와 인연을 끊은 적도 없고 끊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데 그 사실을 그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니 그의 부음은 그 소식을 마땅히 들어야 할 사람에게 제대로 가 닿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나와 어떤 상의도 없이 그는 사라졌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부음기사를 확인하려고 신문을 보았다. 그리곤 또 다른 그가, 그녀가 없음에 안도를 했다. 그가, 그녀가, 그분이 죽었는데 내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면 어쩔까 싶어서였다. 어떨 땐 내가 기다리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인가 싶어 소름 끼칠 때도 있었다.     


사실은 미안하고 고맙고 그리운 사람도 있다. 반찬을 골고루 먹지 않고 입이 짧기만 했던 어린 시절 꼭 생선살을 곱게 발라 터프하게 입에 넣어주던 사람이 있었다. 아파 죽겠다고 해도 꼭 때를 밀어주던 분이었다. 이름이 촌스러워 행자니 탱자니  매번 놀리곤 했었는데 나는 그분이 돌아가셔도 이제 알 방법이 없다. 이미 내가 알고 나를 만났던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채 죽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새삼 후회가 밀려온다.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이제 친척들을 부러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나 노년을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은 참 찾아가기가 애매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요즘은 명절이라도 직계가 아니고서는 더욱더 부담될 뿐이다. 얼추 나이를 계산해 보니 돌아가실 때가 된 분들. 이제라도 찾아가 보면 될 것 아닌가 싶다가도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게 이별이 아닌 척 헤어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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