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은 이별의 조건 >
십 년 전쯤 소설 공부한다고 플롯을 만들고 할 때였다.
이야기는 주로 비극이었다.
한때 잘 나갔던 운동선수가 있었는데, 그는 어떤 사고를 치고 한적한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아주 착한 여인을 알게 되고 그 여인은 심신이 망가진 한 남자를 돌보게 된다. 여인의 정성과 사랑, 보살핌으로 선수는 회복을 하고 다시 재기를 한다. 그는 어렵사리 그토록 원하던 팀에 들어가서 우승과 동시에 선수로서 최고상을 받게 된다. 그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하던 여인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을 차려놓고 며칠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주지 않는다.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어졌다는 생각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남자가 돌아왔을 때.... 돌아왔을 때...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머리를 짜다가 너무나 진부하고 유치한, 70년대 영화(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소재 같은 생각이 들어 쓰다 말았던 적이 있다. 대충 남자가 돌아가지 않고 여인의 죽음도 모른 채 이야기를 끝내려고 했던 걸로 기억난다. 남자는 여인의 어떤 소식도 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이곳을 떠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사실 저 이야기 공식은 ‘남자의 성공에 기여한 역할의 여인이 버림받는다’는 한국 드라마의 단골 플롯이다. 남자의 직업이 무엇이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막상 잘되고 나니 마음이 변한다는 인간의 이기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꼭 성공대상이 남성이 아니어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조건과 환경이 변하면 그 이전과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관계 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은 결말이 복수로 바뀌었을까?
살다 보면 우리 일반인들도 대단한 성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이 잘 나갈 때 다른 한쪽은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태도와 언행이 달라진 그 사람은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된다. 외려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치부하며 과거를 잊고자 애를 쓴다.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고 누군가를 버린 그 사람이 차라리 망했으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돈을 덜 벌었거나 아직 무언가를 마련하지 못했기에 우리 더 노력하자 서로를 다독였을 때가 그립기 때문이다.
서로 같이 한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선물에도 크게 고마워하던 당신이,
언제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최선을 다하던 당신들이,
그런 당신만 보던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울어주던 당신들은 어디 간 것일까.
그런 당신을 다시 느끼기 위해 어려웠을 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성공했기에 그 성공을 같이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바로 앞에 있는 상대가 소중하지 않게 된 거라면 나는 당신의 성공만은 절대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의 성공을 기원한 지난시절을 기꺼이 후회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흘러간다. 우리는 말로만 글로만 소중한 사람이라고 상대를 지칭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주 비싼 유리잔을 다루듯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고 제일 먼저 챙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혹시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를 그저 소중한 사람이라는 타이틀로만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