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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7. 2023

첫눈과의 진짜 헤어짐

< 여기 눈 와 >

잠시 눈발이 흩날렸다. 

정확히는 흩날리다가 사라졌다.      


카페에선 주인장이 유튜브를 통해 ‘가을에 듣기 좋은 노래 100선’을 틀어주고 있을 때였다. 문득, 수많은 약속들이 음악을 타고 흘러갔다.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통째로 어떤 패키지가 되어 희미하게 눈앞에 당도한 듯 보였다. 더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꾸 기억하고 싶어지는 건 왜였을까. 


카페를 나와서 조금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여기 눈 와.’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이십 대 여자분이 누군가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지금을 알려주었다. 스쳐지나 왔기에 그다음 대화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디에서 몇 시에 보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눈이 온다고 기쁘게 알릴 사람이 있다는 건 아직 젊다는 뜻일 테다. 마음이 말이다 마음이 늙어버리면 눈이 오는 것이 반갑지가 않다. 숙제가 많은 사람도 눈 오는 것이 귀찮다.      


생각해 봤다. 우린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들을 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그 약속을 하지 않았을까. 마치 착한 일을 하면 성탄절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다는 부모님의 말씀처럼 진실과 상관없이 때 되면 꼭 등장하던 그 말. 그 약속들을 돌아봤다.      


여학교만 15년을 다녔다. 대체로 그 약속은 성인이 되기 전에 빈번하게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매일 일정 시간을 보게 되는 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오고 갔던 대화였다. 그 약속은 아마도 겨울이 오기 훨씬 전에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 지금의 감정이 그때까지도  변치 말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 테다.


그땐 몰랐는데 중요한 조건 하나가 바로 같은 지역에 살아야 약속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만나고 계절을 같이 지나오다 보니 첫눈의 시점 같은 건 변수가 아닐 정도의 거리 내에 살고 있었기에 약속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여기 눈이 온다고, 나에게는 첫눈인데 상대방 지역에서는 아닐 수 있으니까 말이다. 첫눈이라는 건 당연히 내 눈으로 확인해야 첫눈이니까.      


대학생일 때도 별생각 없이 첫눈 오면 어디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또 누가 되었건 어디에서 만나자 했건  큰 구속력 없이 흐지부지 되었던 것 같다.      


조금 웃긴 건,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했던 수많은 대상들, 그리고 장소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때의 설렘들은 오롯이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첫눈이 가지고 있는 대체불가의 낭만성, 첫눈이 내릴 때의 아련한 풍경, 첫눈이 사라질 때의 아쉬움,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 빅데이터로 축적되어 마음은 벌써 촉촉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확하게 그리운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았다.      

바로 첫눈도,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할 사람도, 첫눈이 오는 거리도 아닌....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깨달았다. 이제는 촌스럽고 사라진 것 같은 그 말이 그렇게 그리웠을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디선가 잊고 있었던 반가운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 말.  노래 가사에도 있다. 

  

슬퍼하지 말아요

하얀 첫눈이 온다고요

그리운 사람 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내다 보네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썼다. 


당신은 왜 나에게 첫눈이 온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아니 나는 왜 첫눈이 온다고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말한다고 첫눈이 멈추거나 줄어들지도 않는 건데 우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요? 꼭 이루어질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과 나의 첫눈을 무심하게 보내버린 것 같아 뒤늦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었습니다.  우리 다음번 첫눈이 오기 전에는 꼭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로 해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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