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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7. 2023

이별하기 참 좋은 계절

< 지금 결심하세요 > 

가을이 깊어지면 자꾸 달력을 보게 된다. 앞으로 챙겨야 할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이것저것 확인하다 보면 더 이상 넘길 종이가 없는 걸 보게 된다. 곧 연말이겠구나, 또 한 살 더 먹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큰 숨을 쉬면서 말이다.      


모든 축제가 다 끝나고 난 늦가을은 이별하기 참 좋은 계절인 듯하다. 차디찬 겨울을 앞두고 누구든 서로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단풍이 마무리되는 계절엔 무언가 결심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특별히 이별하기 적당한 계절이 있을까마는 새로이 시작하는 봄은 헤어지기에 예의가 없고, 여름은 이별까지 할 에너지가 부족하고, 겨울은 조용히 내년을 준비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달력에서 눈에 확 띄는 12월 25일, 성탄절이다. 꼭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그날은 연말의 분위기와 함께 서로의 사랑을 나누고 싶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더욱 사랑하고 싶은 날이 다가올수록 깊은 마음속에서는 자꾸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무언가 더는 지속하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을 실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없을 것 같다. 이 마음을 숨기고 성탄을 같이 보내고 또 내년을 맞이한다는 건 나를 속이고 상대를 속이는 일이라는 데 확신과 동의가 굳어지는 순간, 그 시즌이 바로 11월이 아닐까.      


그래야 분위기에 휩쓸려 상대와 성탄이나 연말 계획을 잡지 않을 수 있고 약속을 잡지 않아야 헤어지기가 더 쉬울 것이고, 그렇게 올해를 마무리 지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몹쓸 이기적 심사가 발동하는 시간.      


며칠 전 세계불꽃축제 때문에 올림픽대로에서 꼼짝을 못 하고 갇힌 시간이 있었다. 불꽃이 하나둘 밤하늘에 터질 때 막히는 도로 가운데에서도 나는 그 장면을 혼자 보는 게 가장 아쉬웠다. 아름답고 놀라운 장면은 함께 보고 싶고, 맛있는 음식은 같이 먹고 싶고, 좋은 곳은 같이 가고 싶고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은 것들이 비슷하다. 심지어는 누군가와 헤어졌더라도, 아니 헤어졌기 때문에 그 마음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공유한 시간들이 사실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그립고 애틋한지 잘 안다.      


그래서 결론은 그런 중요한 순간을 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 바로 가을 축제와 단풍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참 알 수가 없어 바로 그 똑같은 이유로 혼자인 사람들은 그 늦가을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를 간절히 찾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이 연말연시를 맞이하기가 두렵고 긴 겨울을 혼자이기가 싫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사람을 취하게 되면 대개는 또 완연한 봄이 오기 전에 헤어지기 마련이다. 꽃이 피고 봄바람이라도 불면 꼭 움켜쥐고 있던 미련 같은 걸 후하고 날려버릴 수 있는 용기가 싹트기 때문이다. 영문도 없이 2월 말 즈음 상대가 연락을 툭 끊고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거나 급한 일을 마무리해놓고 다시 만나자는 둥 하는 건 봄이 오기 전에 우리 사이 꽃이 피는 건 보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이다.      


하지만 이별을 했다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바로 다른 이를 택하거나 만남을 만드는 것은 빈번한 이별을 낳게 되는 지름길이다. 아무리 같은 장소를 가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행위를 해도 사람이 다른데 어찌 같은 마음일 수가 있겠나. 공허한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서 상대방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결코 상대를 존중하는 결정을 하지 않게 된다. 만남의 관성 때문에 일정 시간 연애를 이어가고 헤어졌더라도 그 후유증은 반드시 내가 겪어야 할 나의 숙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이별하고 나서는 이별에 에너지를 쏟아버린 나 자신을 좀 내버려 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겨울은 길고 밤도 길기 때문에 외롭기만 할 것 같아도 의외로 무언가를 쌓기에 안성맞춤이다. 오래전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 죽어라 책만 읽고 되팔고 또 사고 읽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저녁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해서 모든 기운을 소진시키고 들어오자마자 씻고 자버린 적도 있다. 무엇이든 성과가 나는 일을 새로이 시작하고 그것에 매진하고 이 삼 개월 버티다 보면 다음 계절이 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별을 계획하고 실천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은 상처가 더 크다고 여길 수가 있는데 앞으로 진행될 상처 총량의 법칙으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예상치 못하게 이별을 고지받고 준비도 못한 채 헤어지는 쪽은 그 순간의 충격과 고통은 더 클지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회복하는 계기나 과정이 더 힘든 것은 아니다. 당한 쪽이 외려 더 잊고 돌아서기 쉬울 때도 있다. 분노와 원망의 에너지가 더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면 지금이다.      


해는 빨리 지고 밤은 점점 길어진다. 노을은 말할 수 없이 찬란하고 새벽안개는 더할 수 없이 아련하다. 시월이 지나면 산과 들과 바다의 색깔은 달라진다. 어쩌면 차가운 머리를 조금 더 유지하고 눈물을 머금을 혼자만의 시간이 새삼 반가울지도 모를 일이다. 망설이고 있다면 지금 결심하고 이 가을이 끝날즈음 행하시라. 그래야 이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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