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8. 2023

기획자의 메모리 노트 2 :

위장이냐 대장이냐

내 몸 지키기


  같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이전과 같은 순간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기획안이 설계안으로 넘어갈 때 해당 프로젝트의 결과물들은 누가 그리고 만드는가. 내가 총괄했던 전시기획은 특정 테마가 부여된 코엑스 전시 같은 단기성, 기획성, 비상설 행사가 아니라 건축물이 있어 국공립으로 건립되는 상설전시였다. 사업기간이 길다. 박물관, 과학관, 테마파크, 홍보관, 복합 문화공간 같은 상설전시는 설계 및 제작 기간이 길기 때문에 지금 내 손에 기획안이 있다 하면 보통 1년에서 2년 후에 개관을 한다. 더구나 많은 제안서에 치여서 살다 보면 무슨 박물관이 언제 내 손을 거쳐서 지금 관람객과 만나고 있는지 심지어는 이 땅 위에 세워는 졌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 일쑤다. 또 아무리 훌륭한 기획안으로 당선이 되었다 해도 설계기간 동안 수정, 변경되고 최종적으로 관람객 앞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광고나 영화처럼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의 반응을 몸소 느끼기도 어렵다. 하여 전시기획자는 역할에 비해하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기가 쉽지가 않다. 아니 어느 지점에서 보람을 찾아야 할지를 알 수가 없다.      


  영화 엔딩 장면에 올라가는 수많은 스태프의 이름을 보면서 더욱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허무함을 실감하기도 한다. 공항 VIP 라운지만 해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땅 파서 무조건 건물부터 짓는 문화였기에 건설사와 건축사까지는 어딘가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앞에 언급한 비상설 전시회도 입구의 배너에 아르바이트 인원까지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LA에 체류하면서 어느 주말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건물외벽에 선명하게 박물관 기획 및 디렉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기획하여 이 땅에 생겨난 박물관 어디에도 내 이름 석자는 쓰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던 박물관이 2년 후에 완공되기까지 누군가는 맨 처음 중요한 내용을 계획된 공간에 최고의 방법으로 연출하여 밑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전시기획자는 막중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 만들어진 구성안을 수정하고 변경하는 일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전문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란 일종의 산통에 가깝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외려 해내는 재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시문화산업이 유럽처럼 독자적으로 역사를 가지고 형성된 것이 아니고, 건축의 하도급, 혹은 인테리어로 취급되면서 시작된 업이라 전시기획자의 위상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전시기획자도 광고나 영화처럼 어엿하게 이름이 올려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동쪽으로 쓰러진다는 법문이 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마치고 나면 꼭 아픈 직원이 있었다. 이삼일을 끙끙 앓아눕는 것이다. 며칠 휴가를 주면 쉬는 동안 충전을 위한 활동을 하기는커녕 시체놀이만 하다 온다는 것이다. 제출이나 마감일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경우 위염, 장염은 단골 질병이다. 컴퓨터 작업을 오래 앉아서 하다 보니 목과 허리 디스크, 그로 인한 신경통도 빈번하다. 나의 경우는 빈혈이 문제였다. 빈혈은 오랜 기간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되며 늘 이런 상태이다 보니 육체적 불편과 고통에 익숙해진다. 밤을 새우고 제안서를 제출한 다음날 아침 분당 수서 간 고속화도로를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곡선도로의 잔상이 남아 직선도로까지 계속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겹쳐져 보이는 도로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 바짝 정신을 차리고 운전했지만 두 줄, 세 줄로 보이는 도로선 위에서 그냥 감각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안과로 갔더니 살짝 내사시가 왔고 될 수 있으면 저 산 너머 구름을 보듯 멀리멀리 시야를 두라고 했다. 늘 그렇듯 특별한 처방은 없고 눈을 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예전에도 밤을 새우거나 며칠 야근을 하면 계단이 평면적인 미끄럼틀로 인식되고 책을 펴면 초점이 바로 맞추어지지 않곤 했다. 눈이 급격히 나빠지니 덜커덕 겁이 나 병원으로 달려가 내과 검사를 했다. 결과는 영양실조에 의한 빈혈 증상이 심한 경우로, 100점을 만점으로 치자면 빈혈점수는 4점이라고 했다. 살면서 몸에 피가 부족하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숨이 찬 것으로 여겼는데, 혈액에 산소가 적어 그랬던 것이고, 갑자기 일어서면 핑하고 별이 서너 개 보였던 것, 신경을 좀 쓰면 뒷머리를 쥐어짜듯 예민해지던 것,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졸음운전의 연속이었던 것, 소화가 안 되면 순환이 안 되어 그런 줄 알았는데 그날 밤 잘 때 유난히 다리가 저리던 것.... 등등. 딱히 어느 한 곳이 티 나게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늘 그저 그랬던 날들의 끝에 결국 극심한 빈혈 판정을 받은 것이다. 배가 부르면 머리가 무거워진다고 밥 먹는 시간을 건너뛰고, 운동 같은 건 배부른 자의 사치일 뿐이라고 살았던 벌이었을까.    

  

  이러저러한 증상의 나열과 미래에 대한 경고보다, 빈혈수치를 점수화한 것이 내게는 큰 효과가 있는 진단이었다. 100점 만점에 4점이라니... 빈혈은 단기간에 쉽게 좋아지는 병이 아니라서 일 년을 치료해도 숫자는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일 년 후에 갔더니 정말로 25점밖에 되지 않아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안과적인 증상이 신기하게도 사라진 것이다. 빈혈로 인한 일시적 연쇄반응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증상이 심해지는 부위가 있다. 여성의 경우 복잡한 몸의 구조상 여러 기관이 연쇄적으로 조금씩 나빠진다. 마감일만 다가오면 위염으로 고생하고, 일이 끝나면 다시 장염으로 며칠 드러눕고, 때 되면 극심한 생리통으로 아무 데도 못 가고, 먹는 걸 그리 즐기지도 않는데 살은 찌고, 하루 종일 마신 카페인의 총량은 여지없이 수면의 양과 질을 방해한다. 대개 증상이 비슷하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살찐 기획자는 어쩐지 예리할 것 같지 않아 일을 맡기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큰 병이 아니라 여겨 알면서도 방치하며 살고 결국 만성병이 되는 것인데, 이를 조기에 근절하는 방법은 자기 절제와 일상의 규칙성에 있다.      


  나 혼자 살 경우 만성병을 고칠 확률은 거의 없고 그대로 그 만성이 일상화될 확률은 매우 높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더욱 민감해야 한다. 또 하나 자신의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나타난 증상을 무슨 오랜 훈장처럼 자랑한다든지, 이 정도 고통은 받아야 일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있다든지 말도 안 되는 자기기만의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리랜서들 중에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은데, 사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 약속이나 한 듯 한 두 가지 고질병을 달고 산다. 기혼 여성은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라도 일찍 일어나야 하고 신경 쓰고 몸을 움직여야 할 일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늘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습관이 배어있다. 하루 중 오로지 나만의 시공간이 주어져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할 때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일을 한다. 미루어 봤자 내일 일만 더 많아지므로 즉각적으로 해결한다. 좀 하다 보면 금방 아이가 돌아오고 남편이 퇴근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플 시간도 없고, 아파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프기 전에 나 자신과 타협하거나 아픈 후에라도 나 자신과 조율하며 자기 통제에 익숙해진다.  

    

  그리하여 혼자 우아하게 자기 생활을 마음껏 즐길 줄 알았던 멋진 프리랜서 여성들은 십 년, 이십 년이 지나 더 늙어 있고 더 경쟁력이 떨어진 채로 무기력하게 변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프리랜서 생활을 권하지 않는다거나, 결혼을 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을 즐겁게 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일은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고 싶다면 자기 통제는 필수다. 피가 섞인 가족도 아니고 배우자도 아닌 돈이 사이에 놓인 이해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면, 손가락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스르륵 사라진다. 일로 맺은 관계는 일을 같이 할 때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지, 돌아와 벌거벗은 몸으로 혼자 지켜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오롯이 남겨진 내 몸뚱이 하나다.      


  아무리 근사한 일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있고 그때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그 일을 오래 할 수 있을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기획자는 자신의 몸에 누구보다 예민해야 하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캐치하여 일과 함께 일 속에서 잘 다스려야 한다. 어디 산속에 들어가 두어 달 공기 좋은 데서 자연의 음식이나 먹고 오겠다는 식의 진부한 멘트는 거두시라. 평소 365일 건강해야 누구를 만나도 짜증이 나지 않고, 어떤 업무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한 게 우아한 건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