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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고독한 게 우아한 건가요?

< 기획자의 점심 _4 >

 회사동료 중에 혼자서만 밥을 먹는 이가 있었다. 아무리 같이 나가서 먹자고 해도 아니요,라고 대답하던 그 완고한 입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친구는 사실 같은 부서에서 왕따였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식 왕따나 이른바 학교 날라리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경향이 있었다. 형제가 없다 보니 늘 친구에 목말라 친구 사귀기에는 편향적인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학창 시절 교우관계는 보통사람들보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에 보다 잘 공감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온 친구였기에 나는 그녀가 어떤 이유로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는 밤을 새야 할 일이 있어 야근을 하고 있는데 새벽녘에 그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다. 퇴근을 했지만 다시 회사에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미국에 팩스를 보내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그렇게 늘 미국과 연락을 위해 수시로 새벽에 와야 했고 답신을 받기 위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다른 직원들과는 일상패턴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튀지 않기 위해 조용히 생활한 것인데, 다른 직원들이 느끼기엔 사회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저는 혼자서 아주 우아하게 밥을 먹어요.”     


  그녀와 함께 우연히 회의테이블에 같이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순간이 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 친구는 자신을 이야기했다. 마치 그동안 당신이 같이 밥을 먹자고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이라도 해준다는 듯이.      


  “아, 그래요? 어디서요?”     


  사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아주 우아하게’ 먹는다는 행위에 있었지만 나는 좀 더 일상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아주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테이블 웨어와 식기가 제대로 세팅된 하얀 테이블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해 와인과 함께 혼자 천천히 식사를 한다고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혼밥이 일상화된 시절이 아니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게 먹는 이나 보는 이나 무척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너희들은 맨날 바쁘게 살고 밥도 우르르 몰려다니며 먹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거의 매일 그렇게 먹는다고 했다.      


  “혼자 먹으면 좀 쓸쓸하지 않나?”     


  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녀는 고독이 반찬이라고 했다. 그렇게 먹으면 마음속의 분노 같은 게 사라진다고도 하였다. 이십 년도 더 지났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내겐 꽤 신선했던 장면이었던 듯하다. 그 후로도 나는 그녀가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없고, 여전히 우리와 같이 밥을 먹은 기억도 없다. 그 친구는 업무가 폭증하던 우리 부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그 후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녀를 떠올리면 자주색 코트를 입고 근사한 레스토랑의 하얀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게 고독한 식사를 이어갔는지 궁금하다.     

 

  나는 코로나 전까지 만해도 혼자 가서 식사를 오래 즐기고 오는 곳이 있었다. 집에서 차를 타고 십 여분 거리였는데 사람이 없을 시간에 가서 그 카페의 시그니쳐 메뉴를 시키고 배불리 먹은 다음,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또 한 번 다른 메뉴를 시켜 다 먹고 오곤 했다. 그런 카페를 우연히 발견하고 장시간 있어도 누가 되지 않을 좋은 자리를 정해 놓고 마음이 변할 때까지 그곳을 방문하는 것이다. 꼭 식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지 않을까. 마음 둘 곳 없는 요즘 세상에 나만 아는 케렌시아라 해도 좋겠다.      


  돌아보면 그런 곳에서 그런 시간에 썩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조용히 책도 읽고 글도 쓴다고 바리바리 싸들고는 갔지만 올 때 그대로 싸들고 왔던 날들이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 무(無)의 시간으로 기록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행동이나 조금은 억울했던 일들, 알게 모르게 스며들었던 분노의 감정들이 정리되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사람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알쏭달쏭한 그 의미는 상처받은 내 마음속에 차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가라앉힐 시간의 다른 말인 것을.      


  고독식당을 즐기다 못해 고집했던 옛 동료를 다시 떠올린다. 살면서 수많은 점심을 먹었는데 점심시간에 꼭 점심을 먹지 않던 그녀의 고집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우아한 점심을 즐기는 모습만 생각나는 이 메모리를 저장한다. 지금도 혼밥을 즐기다 못해 고집하는 많은 기획자들이 고독을 가끔 즐기되 일상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고독을 즐기는 것과 실제로 고독해져 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고독이 창작의 배경이나 일시적인 동력은 될 수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창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는 어떤 특정한 감정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묵은 감정은 어느 정도 용량이 차올랐을 때 털어내고, 나 자신을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 기획자는 창조적이어야 하지만 창작만을 고집하는 예술가가 아니다. 바닥을 치고, 하늘까지 올랐다가도 다시 인간계로 돌아와 객관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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