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점심 _ 3>
밥 먹고 가기 애매한 위치에 상대편 회사가 있을 경우 나는 아예 일찍 간다. 자기들은 점심 먹고 들어올 테니 니들은 먹든지 말든지 와 있으라는 의미로 해석돼 더 철저하게 회의 준비를 해간다. 늦어도 12시 30분에서 40분 사이 도착해 약속시간보다 일찍 가서 회의 테이블에 무겁게 앉아 있는다. 앉아 있다 보면 밥 먹고 들어오는 참석자들이 노출되고 그럼 어쩐지 약간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은 회의를 임하게 된다. 기획자는 회의를 주도하거나 구성안을 보고하거나, 설명할 때가 많다. 발표를 하겠다고 미리 와서 앉아 있으면 사무실 풍경도 보이고 내가 설명해야 할 내용도 다시 톺아볼 수 있다.
밥을 먹고, 먹자마자 회의를 하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첫 번째는 회의 시간을 좀 길게 가져도 된다, 즉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성이 있다거나, 해줄 말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렇더라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뜻이다. 회의가 늦게 잡히면 퇴근 무렵이나 본인 스케줄에 영향을 받기 쉬우니 빨리 처리하고 가겠다는 속내가 들어있다. 세시 네 시에 또 회의라는 둥 자신은 바쁘다는 첨언을 곁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일이라면 오전에 보자고 할 수도 있는데 10시나 11시가 되면 점심시간이 걸리게 되고 서로 원치 않는 식사자리가 생길 수 있다. 어쨌든 한시 회의는 상대를 살짝 배려 안 하고 자신의 입장만 고려한 결과이다.
사실 이렇게 중요한 일정으로 한 시에 회의가 잡히면 임원급이 아니고서는 점심을 패스하게 되기 마련이다. 오전 내내 회의 준비를 할 것이기에 말이다. 또 발주처나 협력사에 오래 잡혀 있게 되고, 회사로 복귀하면 어느덧 5시가 다 되어 그날 하루는 회의로 날려버리기 쉽다. 회의로 하루가 영향을 받으면 괜히 다른 일은 하지도 못하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획자는 회의가 끝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이 밀려오므로 마음은 더 급해진다.
그래서 한 시 회의를 잡고 통보하는 발주처는 협력사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같은 논리로 내가 회의를 잡을 때 한시는 피해야 한다.
혹시 예상외로 회의가 일찍 끝나 늦게라도 점심을 먹을 의지가 생긴다면 그땐 허겁지겁 대충 메뉴를 고르지 말고 여유를 갖고 식사할 수 있는 메뉴를 택한다. 사람이 참 웃긴 게 아예 시간을 한참 지나 점심시간이 지나버리면 먹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접어 버리므로 다음 순서를 계획하는데, 점심은 못 먹었는데 일이 애매한 시간에 끝날 때 여유가 생기기보다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뭔가 뒤처졌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래서 다음 스케줄이 없는데도 서둘러 밥을 먹게 되고 퇴근하긴 이르므로 늦은 오후에 다시 동력을 살려내야 한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일어난 일은 돌아보지 말고 항상 지금부터여야 한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은 회사생활에 있어서 꿀 같은 시간이다. 독서실 같은 사무실 분위기라면 유일하게 콧바람 쐬며 내 마음대로 자유가 주어지는 시간이다. 학교 다닐 때 꼭 점심시간에도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 같은 참고서를 펴고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순간에도 늘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숙여 끄덕도 안 하는 친구였는데 성적은 중상위권 정도였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점심시간을 충분히 중간 휴식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수학시간에 영어 하고, 영어시간에 국어하고, 자율학습 시간에 자고, 체육시간은 빠지고 하는 친구들은 늘 바쁘고 정신만 없지 효율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성적도 별로였다.
사회생활을 십 년 이상 하다 보면 자기 몸에 맞는 생활패턴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이른 아침에 바짝 일을 하고 점심은 이른 시간에 아주 간단히 속만 채우고, 다섯 시에는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엔 운동하러 간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런 경우의 점심시간은 자기 신체리듬에 맞추어 최적화된 시간활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업무의 효율성과 건강관리 면에서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전 11시, 12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한잔하고 점심이지만 아침을 먹고 머리가 깨는 3시부터 컴퓨터를 켜서 서너 시간 일하고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10시, 11시부터 새벽까지 일을 한다 했을 때 점심은 의미가 없다. 점심은 낮에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휴식이나 에너지 충전이다.
기획자는 머리를 많이 쓰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는 게 좋다. 두뇌회전은 해가 지게 되면 느려지고 그 사이 다른 정보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집중력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오전 시간의 파워풀한 가동을 위해 아침도 중요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보충을 위해 점심 또한 중요하다. 만약 하루에 두 끼만 먹어야 한다면 아침과 점심을 추천하지, 아침과 저녁이거나, 점심과 저녁은 아니다. 한 끼만 먹을 수 있다면 늦은 점심이다. 해외출장을 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하루 세끼를 식사시간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음을 알 수 있다. LA에서 집필을 하다 보니 이곳을 자주 예로 들게 되는데, 겨울엔 해가 유난히 짧고, 또 한국인들처럼 바쁘고 빠듯하게 다니지도 않고, 한국처럼 저녁문화가 당연시되지도 않다 보니 짧게 끊어 세끼를 먹기보다 하루 한 끼를 여유 있게 먹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식사를 하면 그 나머지 시간에 모두 일을 할 것 같아도, 결국 루즈한 일상이 되기 쉽다.
기획자는 저녁을 대충 먹어야 아침이 가볍고 일찍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에는 그냥 점심을 먹기를 권한다. 한 시에 회의가 있을 때를 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