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8. 2023

서점에서 고민하기

< 기획자의 점심 _2 >

 답답할 때 훌쩍 서점엘 간다. 


  밥은 먹기 싫고 그렇다고 일은 하기 싫고 시간은 아까울 때.  

  요즘은 구글링만 열심히 해도 웬만한 논문까지 다 찾아볼 수 있으며, SNS만 좀 뒤지면 상대에 대해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카톡 프로필 사진만 주르륵 뒤져봐도 어느 정도 관심사나 취향, 성향들을 추정할 수 있고, 장기 비대면의 영향으로 텍스트에 사용하는 단어, 이모티콘, 반응하는 속도에 따라 우리는 상대의 심리를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에 모든 것이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러 발품을 팔아 서점에서 책을 찾고자 하는 일은 흡사 ‘7080 낭만콘서트’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요즘 친구들은 한 달간 제안서 작업을 하면서 책 한 권 사지도 읽지도 않고 오로지 인터넷만 이용한다. 같은 책인데 E북으로 판매되는 간행본도 많다. 만약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면 그 어려운 책을 먼저 읽고 해설해 주는 리뷰용 유튜브도 천지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먼저 관계된 전문서적과 단행본, 논문을 찾고 주문을 해놓거나 출력을 해놓는다. 기획을 위한 독서는 꼼꼼하게 읽는 정독이라기보다 훑어보며 관련된 정보 찾기에 해당한다. 여러 책을 사서 같은 주제인데 어떻게 풀었는지 비교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사박물관을 기획한다고 보자. 먼저 ‘여성사’라는 텍스트가 들어간 책은 모두 검색해 본다. 시대 순, 테마 별, 이슈별로 몇 권 목차를 살펴보면 대충 흐름을 알게 된다. 이제 전문서적이 아닌 동화, 소설, 시 등의 문학작품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이 있는지 찾아본다.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은유나 기발한 상상, 적절한 비유는 문학작품에서 누군가 먼저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는 내 의지대로 책을 검색하고 선택하기 쉽다. 요즘은 절판된 책도 중고로 개인거래 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고 기획에 임하다 보면 누구를 만나도 자신 있는 발표자가 된다. 이 건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시간은 없는데 다들 바쁠 때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새 내용을 다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게 된다. 그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기획자가 맞을 것이다. 마치 시험을 치고 나면 우등생에게 몰려와 정답을 확인하는 이치와 같다.      


  많은 책을 뒤졌는데도 딱이다 싶은 책이 나오지 않을 때, 그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점에 가보는 것이다.      

  예전에 회사 근처에 대형서점이 있어서 툭하면 점심시간에 서점엘 가곤 했다. 한번 둘러보고 오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줄어들고 그만큼 알 수 없는 보람도 얻어진다. 서점에서 책을 찾고 고를 때는 그 바로 옆에 꽂힌 책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원래 찾아야 할 정보가 아닌 엉뚱한 책에 이끌린 적이 많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책이 하필 거기 있기도 하고,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도 왜 그리 많은 걸까. 이삼십 대에는 모든 필요한 책 말고도 꼭 읽어보고 싶은 시집을 같이 샀다. 어렵고 보기 싫은 전문서적들 속에서 시집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문학적인 사람이라도 된 듯 위안이 되곤 했다. 그렇게 책들의 숲을 지나 다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점심 한 끼 이상의 배부름이 함께 느껴졌다.      


   LA 다운타운에 ‘더 라스트 북 스토어’라고 하는 레트로 분위기의 서점이 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 하여 꽤 유명한 서점인데 헌책들이 즐비하게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어 책을 찾고 사려는 사람들보다 고서점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보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나 역시도 아주 오래된 책 마을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으로 만든 아치형 터널도 있고, 타자기에서 나온 종이가 천정에 닿도록 한 소품도 있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여행용 트렁크를 쌓아놓고 작은 그네와 함께 벤치도 있어 휴식하러 책 구경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낡아빠진 그 책들이 각각 아주 오래 산 사람들로 느껴졌다. 각자 자기 인생 이야기를 담고 서 있거나 앉아서 나는 이렇게 살았어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치자면 세상 사람들이 재미없고 지겹게 보더라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이야기 인가. 서가에서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들고 그 무게감에 따라 책장을 넘기고 몇 페이지 읽는 것은 어쩐지 주인이 없는 집에 잠깐 들어가서 한눈에 집 구경을 하고 오는 기분이 든다. 해외출장을 가게 되면 꼭 서점을 방문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예전에 기획 상무 한분이 직원들에게 너는 앉아서만 일을 하느냐, 현장에도 가보고 좀 돌아다녀보고 글을 써라 했었다. 그 말 듣고 업무시간에 새로 오픈한 박물관 가본다고 나갔다가 엉덩이가 그렇게 가벼워서 어떻게 글을 쓰냐고 산만하면 생각이 정리 안 된다고 혼난 적이 있다. 생각 끝에 서점에 갔다가 내 돈으로 책을 가득 사 왔더니 몇 권 중에 어떤 책을 자신에게 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빌려드리고, 나는 서점에 가서 똑같은 책을 또 구입했다. 그다음부턴 책을 빌려달라는 말씀도 안 하시고, 자리에 없는데 임원이 나를 찾을 경우 직원들은 서점에 갔다고 둘러댄다고 했다. 한국 조직문화 정서에서 책상에 앉아 신문을 펴놓고 보는 것은 한가한 일이나, 서점에 가는 것은 부지런 일이 된다.       


  기획자에게 서점은 참 유용한 도피처이다. 설령 아무 책을 사지 못했다 하더라도 책은 마음의 양식이고, 내 마음 하나는 살짝 채워졌으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밥 잘사는 기획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