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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밥 잘사는 기획자

< 기획자의 점심_ 1 >

밥을 잘 사는 것이 속편 하다. 


  어차피 비싸진 커피도 사야 하는데 받고 돌려주기보다 먼저 줘버리는 게 어떤가.      


  사실 점심값이 만만치가 않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누군가의 밥값을 낸다는 것이 MZ 세대에겐 썩 반갑지 않은 계산법일지 모른다.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높은 직급의 구성원이 밥값을 내는 문화도 없어진 지 오래다.      


  어느 시기 소규모의 디자인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삼 년 정도 근무했다. 서너 명 나보다 십 년 이상 아래인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고, 방학 때는 인턴이 합세해 자식과 같은 세대인 학생과도 자리를 같이했다. 연장자인 내가 계속 밥값을 내는 것이 서로가 부담스러워 점심시간에 혼자 먹을까도 고민했었다. 삼사 개월은 다이어트를 핑계로 혼자 샐러드를 시켜서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사기로 마음먹고(물론 아무도 몰랐겠지만) 불규칙을 가장해 슬그머니 계산을 했다. 밥값을 계산하지 않은 날은 인원수대로 커피를 샀다. 달달한 게 생각나는 오후엔 간식을 배달시켜 나눠 먹었다. 밤을 새운 날 새벽에는 편의점 음식들을 사가지고 갔다.      


  돈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들과 같이 한 시간에 대한 나의 예의였다고나 할까. 직장생활 얼마 안 된 친구들이 점심을 사주기엔 빠듯할 것이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얻어먹는 건 싫었을 테니 각자 계산하는 건 당연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나지만 그렇다고 밥값을 내는 명분이 매일매일 생기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냥 밥을 사주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은 전달되었던 것 같다. 얻어먹는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상대의 부담을 염려 안 해도 되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는 또 얼마나 힘든 가. 지금도 그 시기를 떠올리면 일보다는 밥을 같이 먹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추억을 회상할 때 흔히들 식사장면을 많이 떠올리곤 하지 않는가. 누구는 어떤 특정 메뉴를 먹지 못하는데, 누구는 어떤 음료만 고집하는데,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배려 깊은 선후배로 인식되는 일상이 아닐까.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목적 없이 그냥 밥을 사주고자 하는 진정성도 전달되듯이, 마찬가지로 다른 목적 때문에 밥을 사겠다는 것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점점 밥 먹는 자리가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밥상 메뉴 아래 숨은 나 혹은 상대의 진짜 메뉴 때문일지 모른다.    

  

   의도 없는 친절과 호의는 그 사람 주변을 따뜻하게 한다.      


  자주 밥을 사면 확실히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 같다. 기획자의 끝에는 팀장이나 리더, 오너의 자리가 보이기 마련인데 꼭 지위가 높아지지 않더라도 밥을 잘 사는 기획자로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실수도 줄어든다. 식사 메뉴는 밥값을 계산하는 사람이 정할 때가 많은데 자연스레, 동선과 구성원, 그 자리에 대한 의미 같은 경험 데이터가 쌓이게 되고 각박한 사회생활을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만남의 성격에 따라 약속장소를 정하는 센스, 각종 맛 집, 신 메뉴 등에 대한 거부감 없이 자신감은 물론 융통성 있는 마인드를 갖게 된다.      


  여성 기획자들 중에 누군가와 식사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친구들이 많다. 나 역시도 식사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십 대 때 특히 싫은 사람과 밥을 먹으면 금방 체하기도 했다. 누가 밥 사겠다고 하면 인사로 하는 말인데도 걱정부터 앞서곤 했다. 내가 기획의 ‘기’자도 모를 때 선배들은 그렇게 밥을 많이 사주었는데 따라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배운 게 있다. 밥 사는 자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만큼 하는 시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밥을 같이 먹게 되면 먹지 않을 때보다 몇 배로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점심을 먹지 않는 패턴으로 하루를 살아가는데, 그 친구는 점심을 패스하고 스트레이트로 일을 마친 후 다섯 시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다 같이 나가 한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지만 식사패턴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도 알 수가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업무를 사이에 두고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싶을 때 퍼즐처럼 맞추어지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일상이며, 일상의 중심에 식사가 있다.      


  요즘 세대들이 거부하는 회식문화도 사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끌려 나가는 입장이니 마음이 불편한 것일 테다. 밥을 사 버리면 마음이 개운하다. 얻어먹은 밥은 결국 빚이 된다. 모든 걸 털고 가야 순수한 기획이 탄생한다. 어딜 가면 항상 나처럼 밥값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강하게 의도를 내보인다면 그땐 과감히 양보한다. 기획자는 언제 어디서나 의도를 먼저 드러내놓지 않고 시작해야 한다. 기획은 아주 높은 곳에서 넓게 바라보다 원하는 지점을 정확하고 깊숙하게 공격하는 미사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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