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시 전에 정리한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인 환경, 그날의 변수 때문에 나만의 시간이 여의치가 않다. 문제는 딱 방해받지 않는 그 두 시간, 그만큼인데 끊어지지 않고 오전에 그런 시간이 주어지려면 그 회사는 일이 없거나 내가 능력 없는 임원이거나 남들은 출근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휴일일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해도 오전을 알차게 보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강제적인 출근이 없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각 잡고 책상에 앉기까지 쓸데없는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일을 해야 한다. 머리회전이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원고작업이 있다면 그걸 그 시간에 한다. 완성은 아니더라도 1차로 마무리까지 한다. 출근해서 열 시까지 중요한 일을 무조건 끝낸다(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부팅한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쓰기 싫은 사업개요도 정리하고, 맨날 거기서 거기인 기본방향도 수립하고, 이기기 위한 차별화계획도 짠다. 하기 싫은 일은 대체로 피곤하거나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하고 나면 다른 건 수월해서 일과가 끝난 저녁이 여유롭다. 하기 싫고 어려운 업무를 아주 많이 하다 보면 결국 그 일도 쉬워지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나를 짓누르거나 내 자신을 덮거나 하지 않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업무 영역 중 가장 까다롭고 힘든 그것이 수월해져야 한다.
“저는 분석이 가장 싫어요.”
어떤 후배는 분석을 하는 페이지가 가장 어렵고 짜증 나고 해도 티도 안 난다고 자꾸 미루게 된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저는 분석은 잘하는데 대안을 못 짜겠어요.’ 하며 푸념한다. 또 어떤 신입은 전체를 장악하는 주제를 잡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한다. 분석을 싫어하는 성향이거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주제를 잡는 게 어려운 쪽이라면 사실 기획업무가 적성에 맞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기획이 꼭 하고 싶고 전문성을 인정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연습으로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 분석이나 대안, 전략 수립을 타고난 사람은 거의 없다. 기획의 스킬이라는 것이 대부분 후천적 학습과 경험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전문성을 키울 수 있다.
조금 어렵다 느껴지는 그 부분을 가장 뇌가 반짝일 때 집중적으로 갈고닦으면 된다. 어려우니 쉬운 것부터 하고 자꾸 나중으로 미루다 보면 결국 그 어려움을 마주하기가 싫어 어쩌면 내가 택한 직업이 싫어질 수도 있다. 세월이 흘렀는데, 내가 가장 잘하는 일도 이것인데, 다른 일은 할 줄도 모르는데, 어려움을 미루던 습관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기 싫은 일을 붙들고 있는 기획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잘하는 일과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인 문제이다. 기획이라는 업무와 기획자라는 직업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려면 그 어려움을 반드시 쉬움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걸 미련하게 계속 붙잡고 있지 않는 편이다. 어떨 때는 분명히 신선하지 않은 아이디어인데 그걸 계속 진행해서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있다. 다시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안을 만들 수 없을 때,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제출을 끝내야 할 때, 이번 판은 접고 싶은데 이번이 끝나야 다음을 시작할 수 있을 때, 시험지 받아서 풀다 보면 분명 이번 시험은 망친 것이라는 걸 알겠는데 하지만 시험지는 다 풀고 나가야 하는 것처럼. 게임에서 이번 판은 운이 없어 접고 싶은데 이번 판을 끝내야 다음 판이 주어질 때처럼.
그런 날은 집에 돌아와 언젠가 사두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책을 펼쳐든다. 낼모레 무언가 제출해야 하니 시간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책 읽기를 멈추고 싶지가 않을 때가 있다.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니 더 읽고 싶고 이 책을 덮으면 다시 그 일을 해야 하니 속도도 빨라 짧은 시간에 읽은 양은 더 많아진다고 할까. 학교 다닐 때 시험공부하기 싫은 과목의 시험 전날, 그렇게 괜히 새로운 책을 읽곤 했다. 하기 싫은 일을 앞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일은 나름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이 책을 집중해서 읽다 보면 20분만 지나도 스트레스가 반이하로 줄어든다고 한다. 우리가 꼭 독서를 하기 위해 책을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끔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꼭 들고 다닌다. 그래야 지금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과, 아직 다 안 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부러 그렇게 하기도 한다.
뇌를 많이 쓴 오전시간이 지나면 그 후엔 좀 여유로운 일을 챙기곤 한다. 혼자 생각했던 것을 누군가에게 떠들거나 전하기도 하고 그러려고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긴장감이 풀어지고 새로운 잡념이 들어오게 된다. 기획자의 승부처는 바로 오전 두 시간, 그동안의 집중력에 달려있다. 일주일에 5일을 일한다면 사실상 그 시간은 10시간 남짓이다. 한 달 이면 50시간, 넷플릭스 8부작 시리즈를 시즌 7개 정도 정주행 하는데 그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회사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고 그 시간을 모조리 기획에 충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축구선수가 90분 내내 죽어라 달리며 공을 차지 않듯이, 자신에게 공이 왔을 때 에너지를 모아 끝내 해결해 버리는 결정력이 필요하다. 그 집중력을 제때 잘 발휘하기 위해서 아침에 감각을 깨우는 일상을 반복하고, 버려질 수 있는 시간에 연습도 하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파일 덮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