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자의 오후 _1 >
좋은 기획자는 누구에게 좋다는 뜻일까.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일까.
실력은 어디서 드러날까.
실력은 무엇으로 쌓을 수 있을까.
나는 가끔 그 사람 기획 잘해, 그 친구는 기획을 못해, 기획은 잘해, 기획만 못해, 기획이 강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이 무얼까 생각한다. 대체로 업계 평판이라는 게 있어서 실무 작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는 아주 틀린 말이 오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기획을 잘한다는 의미는 오래 생각하고 고민하여 어떤 주제든 뼈대가 튼튼한 집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이 생각 저 생각을 오래 하다 보면 디딤돌보다는 걸림돌이 많아져 정작 새로운 생각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질문 저 질문에 빠짐없이 답해줄 수는 있다. 그만큼 고민의 단계가 높고 깊었기 때문에 지금 던지는 질문이 어느 단계에서 나오는 질문인지 충분히 안다는 것, 그리하여 내일이 되면 자연스레 그다음의 생각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마침내 나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 팀원 혹은 클라이언트와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면 아마도 좋은 기획자가 기획하는 프로세스가 아닐까.
어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킥오프 미팅(Kickoff meeting)을 한다. 킥오프는 원래 축구에서 시작된 용어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킥을 말한다. 이 킥오프 미팅에서는 발주처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이 처음 만나 서로 인사를 하고 앞으로 진행될 내용과 일정 등을 공유하게 된다. 비대면 문화의 일상화로 만나서 하는 회의가 차츰 줄어들고 줌을 통한 화상회의도 병행하게 되면서 한 번의 대면 회의가 가지는 의미와 범위는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즉, 킥오프 미팅에서 서로 인사하고 밥 먹고 앞으로 잘해보자는 말만 나누지는 않게 되었다.
MZ 세대로 내려갈수록 이런 대면 회의, 다 같이 회의실에 모여 벌서듯 한두 시간 잡혀 있는 회의를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이 클수록 사실상 윗사람의 교화시간이 되기 일쑤고, 조직이 작아도 윗사람의 고민나누기 시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상 회의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좋은 결정을 하는 자리여야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거나, 먼저 생각한 사람의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인 것이다. 어쨌거나 회의의 주인공은 기획자이다. 기획자는 회의의 중심에 서서 더 많이 생각한 의견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좋은 기획자는 내가 제시한 그것들을 통해 여러 질문을 일깨우되, 다시 그 질문의 입을 막는 사람이다.
내 의견을 고집하고 억지로 주장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쉽게 떠오를 수 있는 질문에 언제나 미리 답을 포함한 의견을 제시하여 궁극엔 아무도 질문할 것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항상 예정된 어젠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준비해 가야 한다. 수학이나 영어로 치면 다음 단원까지 미리 예습을 철저히 하고 가야 한다. 오늘 회의 안건이 기본방향이라면 세부계획까지 준비해 놓고 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기획자의 숙명이라 할 만큼 중요한 자질이다. 기획자는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킥오프 미팅이 잡히면 내가 한 고민을 정리하여 내가 고민한 순서대로 최선을 다해 회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원래 오늘 이야기해야 할 분량을 넘어 다소 지나칠 정도로 자료를 준비한 후 뒷부분은 그날 회의진행의 상황에 따라 남겨두어야 한다. 뒤에도 많지만 시간상 여기까지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생각을 다 한 다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자료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면서 페이지를 채워나가야 한다. 내가 맨 처음 고민한 내용이 처음 장표이고, 그것의 해결방안들이 그다음 장표라는 생각으로 자료를 완성한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파일을 열더라도 그 순서대로만 말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혹자들은 본질이 아닌 회의자료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동의할 수 없다. 허접하게 디자인한 회의 자료는 아무리 콘텐츠가 풍부해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무시를 당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특히 첫 만남, 킥오프 미팅 때는 신경을 써야 한다. 처음부터 수준을 높여서 회의 자료를 만들 버릇을 들이면 나중엔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 기획자는 늘 회의 자료를 성의 있게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회의 따로 실제 업무는 따로 할 생각이라면 그 자료는 보여주기 용이지만 내 고민이 담긴 자료라면 그 고민의 결과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유효하다. 한번 잘 만든 회의 자료는 결국 본 제안서나 기획안에 꼭 소환되어 끝까지 활용됨을 명심하시라.
기획자는 말하는 태도도 너무나 중요하다. 당신들이 단편적으로 쉽게 던지는 그 질문을 나는 이미 다 해본 생각이고, 그것을 고려, 반영, 적용, 해결한 아이디어가 이것이니 염려 말라는 자신감으로 프레젠테이션해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식의 거만한 자세, 가르치려는듯한 태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더 공부하겠다는 느낌의 겸손하고 친절하면서도 밝은 톤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시니컬하거나 목소리가 작거나 피곤해 보이면 이 또한 내용과 상관없이 발주처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무슨 개인적인 일이 있어 우리 사업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하는 괜한 염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첫 미팅에서 완벽한 신뢰를 주고 돌아와야 그다음은 사사건건 간섭도 줄고 웬만해선 소위 말하는 딴지를 걸지 않는다. 그날 미팅에서 아무도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기획자에게 성공적인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노골적으로 결의에 찬 것으로 보인다거나 승리를 위한 행동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