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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첫번째 날이 운명을 결정지어요

< 기획자의 오후_2 >

주제는 프로젝트를 처음 받은 날 결정한다.      


  어떤 일이든 처음 의뢰받는 날이 있다. 기획자는 그 일을 연락받는 당일, 사실상 뼈대에 해당하는 초기 구상이 끝나야 한다. 아니 끝내어야 한다. 이 훈련을 해놓으면 프로젝트 이름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다음 생각이 펼치질 것이다. 빨리 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제나 테마가  급하다고 빨리 생각날 문제는 아니다.      


  만약 당신이 오전에 연락을 받았다면 당신은 발주처가 떠올린 첫 번째의 적임자 일 확률이 높다. 오후에 받았다면 그 적임자가 일을 할 수 없거나 거절했기에 떠올린 대안일 수 있다. 오후 늦게 일수록, 주말 직전일수록 당신은 여러 대안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당신일지 상대는 한 번에 시원하게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바로 흔쾌히 답을 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고민하고 택한 나라면 나도 상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한다. 상대 입장에서 어떤 점을 고민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 고민이 이해가 갔다면 그 지점이 바로 객관적인 나의 약점일 것이다.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가 왜 중요할까. 오늘이라는 디데이의 남은 시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어떤 사업의 정보를 들었을 때부터 두뇌가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룻밤이 지나면 기획자가 바라보는 방향은 거의 굳어진다. 쳐다보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그 방향대로 길을 찾아가게 되어 있다. 더 공부해서 모든 걸 종합하면 그때쯤 좋은 안이 나올 것 같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을 그 처음에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용기 내어 맘먹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후 세시가 되어도 프로젝트의 방향이 잡히지 않으면 저녁이 되면 더 어렵고 계속 고민한 채 잠들어 새벽녘에야 문득 실마리가 잡힐지 모른다.      


  기획의 과정에서 기본방향이나 전략 같은 계획들은 분석으로 도출된 이성적인 결과들이다. 따라서 사업은 다르지만 기본방향과 전략이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제, 테마, 스토리와 같은 항목은 항시 새로 워야 하고 특별해야 하기에 기획자의 창의성이 그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창의성은 시간과 비례하는 능력이 아니다. 시간을 들인다고 도출되는 영역이 아니지만, 창의적인 역량을 시간 내어 학습할 수는 있다. 기획자는 누구보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관찰력이 뛰어나야 한다. 어떤 하나의 이슈를 대할 때 높고 깊고 넓은 통찰력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를 원하는 조건에 맞게 가공할 조합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평소에도 이러한 능력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LA에 있는 KFC를 갔더니 매장 한편에 <TOP SECRET PROCESS>라고 적힌 붉은 패널이 걸려 있었다. 부제는 ‘TO GREAT TASTE’였다. 치킨을 만드는 3가지 과정을 RINSED BREADED ROCKED라 크게 써놓고 간단한 설명을 붙인 것이었다. 헹구고 반죽하고 흔드는 레시피는 치킨 말고도 있겠지만 저렇게 무슨 대단한 비밀처럼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한 비법으로 소개를 하니 한눈에 이해하기 쉽고, 정말 세 가지 비법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나는 상업시설에 갔을 때 자신들을 맨 앞에서 소개하는 무언가를 꼭 발견하고 그것을 저장해 놓는다. 훌륭한 차별화 전략 세 가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면 내가 탄 항공사의 매거진을 들추면서 타이틀을 유심히 본다. 마치 숲 속의 사냥꾼이 되어 먹이를 사냥하듯이. 내가 아는 장소지만 다른 콘셉트로 포장한 것을 보고 그때 느꼈던 신선함을 또 저장해 둔다. 대형 쇼핑몰이나 아웃렛, 백화점, 호텔 등이 신규 오픈하기 전에 그들이 내세웠던 테마와 스토리를 유심히 쳐다본다. 그리곤 오픈 시즌에 맞춰 직접 가보고 그 테마가 잘 구현되었는지, 공간의 분위기와 전체 색조는 조화를 잘 이루었는지 살펴본다. 넷플릭스나 디즈니의 시리즈가 공개될 때 본편보다 예고편을 더 챙겨본다. 전문가는 길고 복잡한 내용을 단 한마디로 정의하는 사람이다. 어떠한 스토리를 무어라 말했고 무엇과 비교했으며, 어떻게 자랑하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이처럼 최신의 상업적 공간과 콘텐츠는 소비자에게 화제성을 일으켜 관심을 모아야 이슈가 되기 때문에 적극적인 마케팅 기술을 구사하며 귀에 꽂히는 트렌디한 용어들을 잘 활용한다. 또, 기존에 있던 그림이고 알던 문자지만 전혀 새로운 포장 기술로 사람들을 주목시킨다. 기획자는 세상에 떠돌고 있는 다양한 텍스트를 주시하며 항상 사람들이 최근에 자주 사용하는 구어체 관행도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평소에 저장해 놓은 빅 데이터를 활용해 느낌대로 주제를 떠올리고 그에 맞는 소주제, 주제를 구현할 차별화전략, 주제를 극대화하는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놓는다. 집으로 돌아갈 때 문득 생각이 나서 차를 세우고 내용을 메모해 놓은 적이 있다. 내친김에 아무 정보가 없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본다. 최초로 들은 사람이 그럭저럭 오케이를 하면 반 이상은 성공이다. ‘괜찮은 것 같다’고 할 수도 있고, 아주 가끔 ‘어, 좋은 생각인데?’라고 할 때도 있다. ‘썩, 와닿지 않는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어렵다’ 같은 답도 처음에 들을 땐 자주 나온다. 웬만해선 듣는 쪽이 어떻게 반응을 했다 해도 사실 내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획은 학위를 얻기 위한 공부나 예술을 표현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및 조건과 환경 안에서 구체적인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공부나 경계 없는 예술이 아니라 분명한 끝이 있어 작업에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기획은 혼자 하는 공부나 예술이 아니라 협업과 자문을 오가며 최상보다는 최적의 답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따라서 꼭 빨리 끝나야 좋은 설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기획기간이 길어서 깊이 있는 결과물이 도출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충분한 기획단계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경우마다 각기 다른 경우의 수에 최대한 정답에 가까운 경우의 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획자는 선택과 집중으로 승부처를 결정해야 한다. 그 향방은 내가 그곳으로 가기로 한 첫날, 그때 운명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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