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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리더의 외출

< 기획자의 오후 _3 > 

세시 이후에는 자리를 비켜준다. 

  퇴근 가까이 해가 질 무렵 돌아온다.      

  

  팀장은 경력이 쌓여서 팀장을 하는 것일까? 팀장이 나이순이 아닌 걸 보면 그건 아닌듯하다. 애초에 팀장 그릇인 사람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도 될 만한 사람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자리가 아무리 주어져도 팀원으로서의 일만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하여 구성원을 이끌고 협업을 하는데 리더로서의 역할은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팀 프로세스를 한 번만 이해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다음부턴 능력 순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전체를 총괄하는 일을 처음부터 더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획 머리가 있는 인력들이다. 전체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능력이 곧 기획의 일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되고자 하는 기획자는 여러 구성원의 통합 채널이 되어야 한다. 종교나 정치에 편향적이거나 서울권 및 지방출신에 대한 고정관념, 학교에 대한 편견, 여성 및 남성 혐오 등, 우리 사회의 흔한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 편을 강하게 선호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적 이유로 선호하는 것이야 상관없다 해도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반드시 걸림돌이 된다. 자기도 모르게 편협한 네트워크를 가지게 되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사업이 달라도 똑같은 글과 비슷한 그림만 만들게 된다. 물론 오래 호흡을 맞춰온 구성원들과 효율적으로 가장 최고의 퀄리티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멤버를 고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획자는 언제든 그 팀을 뒤로하고 새로운 팀을 꾸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타의에 의해 전혀 다른 팀으로 가더라도 똑같은 수준으로 적응할 탄력성이 충분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시절, 박정희 관련 기념관을 맡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호불호가 강한 정치인의 기념관을 수행할 때는 은연중에 각 부분 담당자들의 정치성향을 알게 된다. 이 정치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가끔 프로젝트를 거절하거나 꺼리기도 한다. 기획자에게는 아주 안 좋은 자세다.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나는 관련 서점으로 달려가 박정희에 관한 책을 열 권 정도 샀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고 일주일 동안 그 책들에 빠져서 살았다. 박정희 개인에 관한 기념관이었기에 나는 외부로 알려진 그의 업적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면에 집중해 <진면목>이라는 주제어를 떠올리고 스토리를 구성했다. 진면목眞面目이란 참된 진(眞), 얼굴 면(面), 눈 목(目), 즉,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한다. 중국 송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꼽혔던 소동파가 여산을 보고 진면목이라는 성어를 남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의 참모습을 보려면 그 속에서는 구별이 없으니 밖으로 나왔을 때라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소동파의 시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말처럼 박정희 역시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의 진면목은 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나는 박정희의 진면목을 만나보는 전시주제로 그의 본성과 열정, 믿음을 펼쳐 보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2등으로 낙선하여 쓰라린 추억의 프로젝트로 남았다.      


  몇 년 후 같은 프로젝트로 당선된 작품에 참여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당시 당선되고 설계를 시작하려는 시점에 갑자기 담당자가 전시주제를 <진면목>으로 바꾸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비록 2등 업체였지만 우리는 주제만큼은 <진면목>이 당신들이 제시한 주제보다 더 적절하다 생각하고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주제를 바꾸어 스토리도 바꾸었지만 자신들도 당선된 주제가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동의했다고 한다. 진정성이 담긴 주제는 결국 공감을 이끌어내는구나 싶어, 내심 기뻤던 적이 있다. 조금 더 확대하자면 나의 개인적인 정치성향을 버리고 프로젝트의 성공만을 위해 여태껏 알고 있었던 내용을 모조리 버렸기에 어쩌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텍스트들을 쏟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박정희대통령 역사자료관 전시주제 >


  개념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늘 열려 있어야 한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나라는 인간을 통과하여 물 흐르듯 프로젝트가 진행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른바 심리스 프로세스에 핵심은 바로 기획자의 융통성에 있다.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순발력과 끝까지 버티는 지구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개인적이다 못해 자기만 아는 팀원도, 오지랖이 넓어 사사건건 참견하는 팀원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성향은 양극단으로 치닫는,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다. 우유부단하여 좋은 것을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도 치명적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가 모든 걸 다 하겠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기획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을 보면 무슨 도를 닦은 사람처럼 모든 것에 통달하고 초연해 보이기도 한다.      


  리더로서 기획자는 해당 분야의 인재가 가진 역량의 크기를 정확히 알고 장점을 최대로 이끌어내야 한다. 각 분야별 구성원이 업무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방식도, 속도도, 조금씩 다르다. 프로젝트 기간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고 했을 때 처음에 속도가 빠른 친구, 중간단계에서 남들 하는 만큼만 하는 친구, 마지막에 몰아서 하는 친구같이 특별한 경향성을 가지는 친구는 다음 프로젝트도 그렇게 임한다. 전시 제안서는 기획, 그래픽, 3D, CAD, 편집자들이 합을 맞추며 하나의 안을 만들어 내는 고도의 전문화된 작업이다. 그런데 때로는 기획이, 때로는 3D가, 때로는 편집이 속을 썩여 결과물의 퀄리티를 방해할 때가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다 보면 꼭 쳐지는 사람이 생긴다. 경력이 많은 디자이너도 항상 근사한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프로젝트에서는 분명 세련된 디자인을 도출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진부할 수도 있다. 기본적인 레벨의 범위 안에서 퀄리티는 항상성을 가지기가 너무 어렵다.    

  

  우리가 김밥 집을 간다고 생각해 보자. 주인은 분명 많은 메뉴 중에 김밥이 자신 있거나 그가 판매하기에 김밥이 다른 메뉴보다 좋은 점이 있기에 김밥장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밥이 맛이 없는 김밥집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손님들이 간다는 것이다. 김밥을 맛없게 말고 있는데 그래도 김밥은 팔아야 하고, 또 그걸 먹으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점. 세상은 항상 최고와 최선, 최대의 결과물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획자는 때로 맛없는 김밥이 탄생할 때, 그렇더라도 손님이 맛있게 먹어줄 방법을 끝까지 찾아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겪어 본 디자이너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한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작업을 마치고 밥을 먹거나 작은 아이템이라도 하나의 파일이 완성되어야 커피를 사러 간다. 디자인 작업은 오후 네 시 너머 다섯 시가 과업의 피크 시간이다. 집중력이 최대이며 2시 이후부터 가동된 구간 속도도 최고다. 당신이 만약 그 팀의 리더라면 억지로라도 나갈 일을 만들어 사무실을 벗어나 보시는 건 어떤가. 외부에 있으면 전화 걸기도 받기도 쉽다. 갑자기 생각난 척 궁금한 누구에게 전화하기도 쉽고, 받기 곤란한 전화를 거절할 명분도 생긴다.    

  

  기획자 역시 집중력이 중요하고 짧은 시간이라도 몰입해서 결과를 도출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엉덩이가 무거워 한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는 스타일은 위험하다. 앉으면 바로 시작하고 끝나면 바로 일어나야 한다. 나는 요일을 정해놓고 네 시에 나가 해질 무렵 사무실에 들어온다. 개인 운동을 하면서 자리를 비켜준다. 팀원들은 리더가 안 보이는 시간 동안 잠시 숨통이 트일 것이다. 리더도 외부에서는 내부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깨우칠 때가 있다. 팀원에게 전화할 때 같은 일인데도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업체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도 밖에서 받을 경우, 방어적인 태도보다 긍정적인 태도가 앞선다. 리더가 고정되어 있으면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아도 외려 정체되고 답답해진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입장에 공감을 해주어야 한다. 혹시 감기가 걸려 집중력이 떨어진 채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은지, 엊그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밥은 먹고 다니는지, 집에 암에 걸린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다고 하는데 야근은 가능한지, 지방이 집이라 혼자 자취하는 친구는 계약기간 만료로 다음 거주지를 정하였는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공동 작업을 할 때 개인적인 변수는 어쩔 수 없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팀원들의 물리적인 환경과 심리적인 성향을 알고 있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 비상시 상황에서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진다.      


   우연한 실마리, 그 실마리의 종결은 외부에 나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리더가 사무실로 복귀하면 팀원들은 느슨해졌던 긴장감을 다시 한번 조이게 된다. 리더가 하루 종일 사무실에 붙어 있는 다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일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끝낸다.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것이 곧 기획을 알차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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