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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현장의 추억

< 기획자의 오후_ 4 >

 내가 하는 기획에는 항상 현장이 있다.      


  기획은 책상에서 하지만, 그 기획의 실현은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현장은 공사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아직 건축물도 생기기 전인 대상지 시절이 있고, 한창 설계와 제작이 진행 중일 때가 있고, 모든 공기가 끝나 개관을 한 후로 나누어진다. 기획자가 가장 많이 가는 현장은 아직 이 땅에 건축물이 건립되기 전인 아무것도 없는 나대지가 가장 많다.      


  아주 오래전에 거제도에서 현장설명회가 있었다. 오후 1시 설명회에 도착하려면 김포에서 사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 오려면 설명회가 끝나자마자 시간 맞춰 시외버스를 타고 또 사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장시간 경쟁사와 같은 비행기, 같은 버스를 탄 채로 목적지를 오가게 된다. 그땐 핸드폰도 없어서 설명회 때 녹음도 하지 못했고, 카메라를 가져가야 잡초만 무성한 대상지라도 촬영해서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사람보다는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경쟁사임을 의식해서인지 그 긴 시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다들 생각에 잠긴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을 달리던 낡은 버스의 덜컹거리는 효과음, 정류장에서 섰다가 떠날 때 시골 길바닥으로부터 올라오던 흙먼지, 가끔 지팡이를 짚고 보따리를 머리에 얹은 채 올라타시던 한복 입은 할머니,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이 추억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돌아보면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한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인천의 바닷가 근처에 해양박물관이 생긴다 하여 어느 추운 겨울날 다 같이 현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언덕 위에 위치한 현장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고, 마침내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거친 땅바닥에 불과했다. 아직 계획되지 않은 대상지는 참 허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거기 서서 앞으로 이 박물관은 어떻게 될 것이고, 또 어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말하다 보면 그러고 있는 나와 동료들이 무슨 역사적인 순간에 서있는 것 같고, 그 순간에 동참한 사람들이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때 매일매일 자고 나면 일이 산더미 같이 쏟아지던 대리급의 시절이었기에 바빠 죽겠는데 굳이 인천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행차를 하던 그 임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날씨도 추운데 그는 지금이 제철이니 겨울 석화, 굴 구이를 먹고 가자 제안했고 부하직원인 남자들은 신이 나서 찬성했다. 유일한 여자였던 나는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 끝내려 했던 일이 밀릴 것 같아 그들의 처사가 매우 반갑지 않았다.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굴을 먹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바닷바람을 쐬면서 선 채로 추위에 떨면서 말이다. 그렇게 드럼통 장작불에 굴을 구워서 초장에 찍어 먹고 떠들고 나니 어느덧 해는 어두워졌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 뻔했다. 그제 서야 나는 이 사람들은 애초부터 회사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싫다고 못 먹는다고 손을 내젓던 내게 끝까지 입을 벌려보라 기가 막힌 맛이 다를 강조하며 굴을 먹이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웃음소리, 차갑지만 아주 시원하고 하나도 비리지 않았던 물컹한 굴맛, 그 장면들은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살면서 먹어본 굴 중에 그날의 굴보다 맛있었던 기억은 없다.      


  현장답사가 내게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인지 나는 자주 직원들을 데리고 아무것도 없는 현장에 가곤 했다. 사실 현장을 가고 돌아오는 길에 희한하게도 그 프로젝트를 어떻게 끌고 갈지, 기본방향을 어떻게 설정할지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마침내 이야기가 정해진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현장을 다녀와 각자 자리로 돌아오면 그렇게 되어 있다. 여러 명이 사진을 찍는 것이기에 돌아와 확인해 보면 내가 놓친 장면을 꼭 누군가는 담아 놓고 왔다.      


  “여기는 나들이 가다가 들리기 딱 좋네요.”     


  어느 봄날 젊은 친구들과 함께 춘천에 가게 되었다. 아침에 만나 서둘렀지만 도착해서 보니 햇살이 따가운 오후였다. 알려졌듯이 춘천 가는 길은 도로와 풍경들이 참 예쁘다. 막 서른에 접어들기 시작한 이 친구들은 갑자기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은 일에 치어 찌들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별로 친한 관계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그들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 현장답사를 마치고 나니 배도 출출해 춘천 닭갈비를 먹었다. 마침 그 식당 앞에 소양강이 훤히 보이는 카페가 있었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이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따스한 봄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당시 화두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은가, 하면 무엇이 좋은가, 언제 하는 것이 적당한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한 지식이 없이도 나는 모든 걸 경험해 보았기에 그저 내 소신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그때 그 시간이 참 좋았다고 했다. 같은 장소를 반드시 여자 친구와 다시 오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들었다.      

  그날의 답사로 박물관 기획전시의 주제는 <나드리: NADRI>로 정해졌다. 자칫 가벼워 보일까 봐 잠시 다녀오는 나드리를 기본방향의 서두에 두고 하부방향을 제시하였다. 


< 국립춘천박물관 기획전시실 리모델링 제안 기본방향 >


  그 후로도 나는 사무실에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 작업만 하는 친구들과 부러 일정을 만들어 지방의 현장에 다녀오곤 했다. 혼자서 가기에는 어디건 너무 멀고 힘들고 재미없는 것이 바로 현장이다. 나는 직접 내 차로 운전해서 사람들을 태우고 간다. 한 번은 초여름에 고추로 유명한 청양군에 가게 되었는데 주변 환경을 탐방한다고 호수와 함께 출렁다리가 있는 관광지를 간 적이 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나무들이 거울처럼 호수에 비쳐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참 신기한 게 프로젝트의 성공과 상관없이 목적지나 가는 길의 풍경이 그림 같으면 같이 동행했던 사람들이 좋았던 기억으로 소환된다. 그런 식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뒤덮인 무주의 체육공원에, 봄에는 벚꽃이 휘날리는 경주의 테마파크에, 여름에는 청춘으로 들끓는 해운대 바닷가에 현장방문을 하곤 했다. 달리 시간을 내어 가기 쉽지 않은 직장인들이 답사를 핑계 삼아 놀러 가는 것이라 폄하해도 좋다. 그런 소릴 듣지 않기 위해서 다녀와 더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을 기억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식도 많이 사고 일찍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경치 좋은 카페도 들린다. 자연스레 각자 자신들이 현재 하고 있는 고민들을 하나씩 둘씩 털어놓게 되는데 꼭 해답을 주지 않고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만으로도 직장인들은 서로 위로를 받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나는 정말 고맙다. 내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저 사람에겐 이야기해봤자 답은커녕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던 어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 지금처럼 늦은 오후를 떠올리면 현장이라는 명분으로 대화의 장을 만들었던 추억의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러다가도 사람만이 사람이 힘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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