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희 Dec 24. 2023

지난간 계곡을 그리다

< 내년에 또 가요 >

 우리의 여름은 참 진부하고도 습관적이었다. 어쩌면 역사적이기까지 했다. 봄이 되면 ‘꽃구경 언제가?’를 노래했고 여름이 시작되면 언제 떠나? 어디로 갈 거야? 하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질문처럼 시원하게 답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 3 ,4년 차. 그러니까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 시기 3박 4일의 여름휴가는 거의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모자하나 달랑 쓰고 드라이브 간 곳은 남한산성 계곡이었다. 귀찮고 귀찮고 귀찮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되었지만 계곡보다 좋은 곳은 천지 일 텐데 이 무슨 컨트리 감성이냐 투덜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데 와선 발을 담가야 제 맛이라고 먼저 시범을 보인 아버지. 그리고 언제 준비했는지 참외랑, 수박도 주섬주섬 꺼내던 엄마. 정작 휴가 받은 나보다 두 분이 더 설레어 보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정강이를 난생처음 보았다. 


  무릎 위까지 걷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아버진 생각보다 단단했고 활기찼다. 언제 밀짚모자를 쓰셨는지 그는 잠시 젊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꽤 맑은 계곡 물에 참외랑 수박을 담그시던 익숙한 손놀림도 기억난다. 색깔도어찌나 선명하고 야무지고 단정하던지 먹지 않아도 충분히 익어서 상큼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계곡물이 얼음물보다 차갑다는 걸 그날 알게 되었다. 졸다 끌려 나와 머리끝까지 시원해지던 그 순간은 내 생애 ‘감각적으로 잊혀지지 않는’ 찰나의 순간으로 남았다.

  어디선가 불어오던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손과 발이 서로 재잘거리며 물과 부딪히던 소리를 기억한다. 발은 차갑고 손은 분주했으며 머리는 개운했으나 가슴은 더워지던 그날, 그들, 그리고.


"여름도 잠시야."


  그날은 우리 세 식구가 소박한 여행을 떠나 아무 말 없이도 웃기만 한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린 어디로 떠나지 못했고 떠났다 해도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없었다. 부모님 하고만 떠난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는지 솔직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자기 식대로 조금씩 조작되고 편집된다. 그때가 정말 마지막이었나 싶어 곰곰이 따져보니 두어 번 더 있었던 거 같긴 한데 기억날 만한 장면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날이 내겐 마지막이라 저장된 내 기억의 기록인 것이다. 부모님과의 여행은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던 것을. 매번 제대로 이별하고 이별의 기록도 정확하게 간직해야 했음을. 이제 여름도 떠나는 중이다. 그날의 계곡도 이제 조용히 흘러가겠지. 내년 여름에 또 부모님을 소환하기 전까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 것 아닌데 슬픔이 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