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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4. 2023

콘크리트 노스탤지어

< 아무도 다른 추억 만들지 마세요 >

 여기가 거기일까.


  그곳을 지나갈 때 거의 모든 것이 기억났었다. 하지만 이젠 거의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도 장소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던 그 나무들조차도.


  339동 406호, 612동 305호, 47동 209호......

  한 시절을 머물렀던 장소가 이토록 분명하게 숫자로 기억되는데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니.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땐 분명히 실존하고 있었던 곳.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설 때 왜 전에 있던 우리 집은 무너지고 쓰러져야 했을까. 왜 처음 그 자리에 있던 집은 끝내 사라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집이 지어져야 하는 걸까. 가끔 그때보다 훨씬 더 높아지고 화려해진 그곳을 지나갈 때 과연 내가 거기 살은 적이 있었던가 의문을 가져본다. 돌아보면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시절 하루의 끝자락에 매일 돌아가야 했을 그곳이었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왕복 이야기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얼마 전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를 보고 새삼 나의 아파트 주거인생을 돌아봤다. 도시에 산다는 건 그 당시 땅이라고 불린 콘크리트 위에서 그저 왔다 갔다 한 것 일뿐 그 위에 다른 콘크리트가 덮어지면 도무지 물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 우리네 아파트 인생은 바람처럼 스쳐갈 뿐일까. 그냥 바람처럼 구름처럼 잠시 통과하는 것이라고 나 떠난 뒤 언제나 다음번 바람은 불어오는 것이라고 당신도 그 바람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풍경은 언제나 같았다. 달라지는 변수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가던 친구들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집은 야속하게 사라졌지만 말을 걸고 싶었던 친구의 뒷모습과 망설이던 그 순간은 또렷이 기억난다.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기 릴레이를 펼친 끝에 아무도 양보하는 이가 없던 그날. 결국 공평하게 다시 학교 앞에서 헤어지기로 한 그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내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했던 그 길목. 하지만 학교 앞이 건 친구의 집 앞이건 결국 돌아와야 했던 내 발걸음. 내일이면 또 볼 사람이 확실해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아쉬울 수 있다는 간절함을 처음으로 배운 그 거리. 


  일곱 살 때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와 잠실, 반포, 역삼등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나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내가 살던 집에 대한 그리움이 남다르다. 


  지금 그 거리를 점령한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아무도 다른 추억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홉 살 때 살았던 아파트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건축물로 매일 출근하고 달라진 도로 위에서 높은 빌딩을 바라본다. 


 그땐 내가 살던 아파트 339동과 앞동 사이에 꽤 넓은 아스팔트 공간이 있었고 우린 거기서 날마다 땅따먹기, 오징어게임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호출을 뒤로 친구들과 아쉬운 안녕을 하곤 했다.  집집마다 고등어 굽는 냄새, 된장찌개 냄새가 나면 그 아스팔트엔 아무도 남지 않았고 우리의 아버지들은 손에 과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비록 몇십 년 된 낡은 건물은 근사한 새 건물로 바뀌었지만 그때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영원한 화석처럼 남아 있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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