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 빛과 실 1-한강/문학과지성사

쓰는 사람, 살아내는 사람

by 날마다꿈샘


지난 6월 한강 작가 책 읽기 오프 모임을 하기 전에 읽었던 <빛과 실>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은 노벨상 강연문 '빛과 실', 노벨상 수상 소감 '가장 어두운 밤에도', 노벨 박물관에 기증한 찻잔에 대한 짧은 산문 '작은 찻잔' 등 세 편의 노벨상 관련 산문이 실려있다.

그리고 2013년부터 2024년 사이에 쓴 여섯 편의 산문과 여섯 편의 시가 더해져 '쓰는 사람' 한강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중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북향의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을 관찰하며 쓴 산문 '북향 정원', 2019년 본인 명의로 마련한 첫 집의 네 평 남짓한 정원을 가꾸며 써 내려간 짧은 일기를 모은 '정원 일기', 글쓰기를 통해 인생을 끌어안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시 '더 살아낸 뒤' 등 총 세 편은 노벨상 수상 이전에 썼다.



이 책의 처음을 수놓고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빛과 실'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한강 작가가 여덟 살 때 쓴 사랑 시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 한동안 회자되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이 어린 시절의 시는 수상 강연이라는 중대한 순간에 되살아나 작가가 처음 '쓰는 사람'이 된 그 감각을 투명하게 독자에게 전한다. 그 후 십사 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고,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한강은 온전히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오 년이 흐른 뒤에는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여덟 살 꼬마 시인은 45년이 흐른 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와우!!!


앞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란 첫 문장은 '글을 쓴다'이다.


쓰는 사람이 되어가는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작가에게 쓰는 행위는 단순한 기록이나 표현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였던 것 같다.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과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생명과 죽음, 역사와 인간, 우주와 인간, 물과 바람, 그리고 쓰는 사람의 마음까지, 그녀의 글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려는 실과 같다.



작가는 많은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여정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첫 페이지를 쓴 날로부터 완성하기까지 거의 칠 년이 걸렸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 년 육 개월 동안 썼던 <소년이 온다>는 기간은 더 짧았지만 5.18 당시를 떠올리며 압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극심한 고통과 혼란을 작가는 글을 쓰며 먼저 겪고 느꼈으리라.



한강은 하루씩 살고 쓰자, 그걸 천 번만 반복하자는 각오로 그 시간을 견디며 엉엉 울면서 썼다.

그런데 소설을 써갈수록 점점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글쓰기는 작가를 삶으로 이끄는 힘이었다.




2022년의 기록에서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책의 마지막 시 '더 살아낸 뒤(2023)'는 작가의 소명 의식이 또렷이 담겨있다.



더 살아낸 뒤

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글쓰기로.)


사람들을 만났어.

아주 깊게. 진하게.

(글쓰기로.)


충분히 살아냈어.

(글쓰기로.)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그녀에게 글쓰기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는 일'이며, '충분히 살아내는 일'이었다. 즉, 글쓰기는 인생을 살아내는 방식이며 세상과 가장 깊이 연결되는 행위였다.



이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나 또한 쓰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쓰기 위해 따뜻한 단어들을 주워 담고 있다는 것을.

그 단어들이 지금까지 삶을 붙잡아주는 실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쓴다.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가기 위해서.

온 힘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




keyword
이전 13화13 몽고반점-2005 제29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