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長雨). 오래 내리는 비, 그녀의 기억..

그해 여름,장마 시작 ..그리고 인연의 시작

by 한자카

Chapter05.


검술 위에 피어난 인연[회상 편]


장마(長雨). 오래 내리는 비. 그해 여름, 그녀의 기억도 그랬다. 나에게 장마는

단지 길게 내리는 비가 아니라, 오래 남는 감정의 흔적이었다.


플래시백 (Flashback)ㅡ


장맛비에 눅눅해진 체육관 바닥.

누군가의 땀인지, 남겨진 습기인지 모를 자국만 번져 있었고 발목을 다쳐 현장에 못 나간 나는

그 위에 조용히 앉아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그때 무술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배우 하나 보낼 거야. 간단하게 동선만 잡아줘.”


딱히 물어볼 것도 없이 그냥 “네” 하고 끊었다. 당연히 남자 배우일 줄 알았다.

요즘 역사극이 유행이라 이런 이벤트는 흔한 일이다.


태블릿 화면 속,

화려한 조명도 독특한 무대도 아니지만 어린 무용수의 신박한 춤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순간, 정말로—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이어폰을 낀 채, 운동화에 캡모자,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름이 당장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디서 본 적은 분명 있었다. 스크린 속 장면과 그녀의 실루엣이 묘하게 겹쳐졌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먼저 인사한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자연스레 대답했다. “혹시 어떤 스타일의 액션을 원하세요?”

뭐지.. 이 이상한 멘트는? 커피숍에서 메뉴 고르는 것도 아니고, 으이그, 암튼,


가방에서 작은 노트북을 꺼내더니 동영상을 보여줬다. 홍콩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현란한 검술 액션? 춤사위?

“이걸 참고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물었다. “대본은 혹시 있으세요?”

“아, 있죠.” 그녀가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내밀었다.


한 장씩 넘기며 눈으로 상황을 그렸다. 화려한 검술은 필요 없었다. 대역 없이 본인이 직접 소화하는 씬이라,

와일드한 액션보다는 감정선 위주의 디테일 연기가, 동선보단 감정 밀도가 핵심이었다.” 오히려

절제되고 간결한 동선이 맞았다.


“이 레퍼런스보다, 이 장면에 맞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


나는 가볍게 한 발을 뒤로 빼며 상체를 기울였다. 팔은 부드럽게 흘러가듯 움직였고,

손끝은 마치 무언가를 살짝 잡았다 놓는 느낌으로 마무리했다. 전체 동작은 크지 않았지만,

흐름과 멈춤 사이의 긴장감을 마지막 대사에 맞춰, 시선과 함께 손짓 하나로 연결,

감정을 정리하는 포인트 커팅동작까지. 처음엔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몇 번 시연하자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사흘간,

우리는 거의 말없이 검술만 연습했다. 무릎을 꿇고, 돌고, 튕기고, 칼을 멈추고. 가끔 그녀가 웃었다.

땀이 이마에 맺힐 때면 잠시 마주 앉아 물을 마셨다. 깊은 얘기도, 사적인 얘기도 없었다. 그저,

호흡을 맞추는 사이. 말 대신 검술로 대화하는 시간.


셋째 날, 마지막 자세를 맞춘 뒤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했어요.” “별말씀을요.”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따로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게 끝일 줄 알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혹시 기억하시죠? 그때 검술 알려주신 배우입니다.

이번에 드라마 쫑파티가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오실 수 있을까요?”

손에 들린 폰을 잠시 바라봤다. 그 여름의 땀 냄새와 차가운 체육관 바닥, 그녀의 웃음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웃으며 답장을 썼다. “장소랑 시간만 알려주세요.”


장소는 여의도였다.

혼자 가기 좀 뻘쭘해서, 입담 좋은 후배 두 명을 데리고 갔다. 원래 쫑파티란 게 그렇다.

스태프며 배우며 제작사 사람들까지 섞여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르는 분위기.


어수선하고, 조금은 들뜬 공기. 정신이 없어 핸드폰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저… 저 왔는데요. 어디 앉아 계세요?”

그녀는 감독님과 주요 제작사 사람들이 모인 테이블에 있다고 했다. 순간 부담감이 확 밀려왔다.

“아, 그럼 저희는 이쪽에 있을게요. 나중에 얘기 끝나면 들르세요.”나는 슬쩍 빠져나와

후배들과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잠깐 담배 피우고 싶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솔직히, 생긴 걸로 봐선 담배 안 피울 것 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가볍게 한 모금. 뿌연 연기에 그녀의 작은

얼굴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혼자 괜히 뻘쭘해서 츄파춥스를 빼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2차로 노래방에 간 모양이었다.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시작됐다. X새끼라는 감독 이야기, 욕설이 섞인 조감독, 업계 사람들에

대한 불만 섞인 농담들. 묘하게, 나는 그녀와 대화가 잘 통했다. 아마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시간들을

버텨왔기 때문이었겠지.


그러다 그녀가 툭 던졌다. “오빠, 나중에 무술감독 되면 저.. 꼭 캐스팅해 줘요.”

“무술감독이요? 글쎄요. 될지 안 될진 모르겠지만… 신중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 그런데.. 지금 나한테 오빠?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집은 어디예요?”“지금은 이 근처예요. 곧 이사 갑니다.”

“그럼 이제 자주 못 보겠네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 집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내가 잠시 멈칫하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아, 그냥 같이 가서 얘기나 좀 더 하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럼.. 대신.. 술은 더 못 마셔요.”그랬더니 그녀는, “저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밤, 우리는 같은 택시에 올랐다. 창밖엔 여름밤의 후덕한 바람이 불었고, 라디오에선

90년대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별거 아닌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한동안, 우리는 나름 잘 지냈다.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뮤지컬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끝내지 못한 그 관계. 기존의 여자친구.


언젠가부터 그녀는 그걸 눈치챘는지 모른다.


연락이 점점 줄어들었고, 만나자는 말도 뜸해졌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의 눈빛이, 목소리가,

숨결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렇게 3개월쯤 만났고, 그 끝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했다.

누구도 먼저 끝내자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끝이었다.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공허했다. 딱히 그리움도, 미련도 없었지만, 문득 어딘가 빠진 듯한 하루가 반복됐다.

그 시절 나는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 스턴트 일을 이어가고, 가끔 CF 촬영에 불려 나갔다.

현장에선 다시 까칠한 무술감독, 조감독들과 부딪히고, 사극 현장에선 갑옷 입고 뜀박질하던 날들이 반복됐다.


그녀의 존재는 조용히 기억 속으로 흘러갔고,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웃긴 건, 그 후로 이상하게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는 거다.

또 다른 촬영지, 또 다른 작품, 나는 어느새 또 누군가의 연습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전과는 달랐다.

난 더 이상 쉽게 마음을 주지도 않았고, 상대 역시 적당한 거리 두기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제야 나는 느꼈다. 그녀와의 인연이 특별했던 건, 그 시절의 내가 유독 외로웠기 때문이라는 걸.

사랑도 , 우정도 아니고, 어딘가 그 사이 어정쩡한 감정선 위에 놓여 있던 그 시절.


휴대폰 속 오래된 연락처를 넘기다 보면 가끔 그녀의 이름이 보이고, 그럴 땐 그냥 피식 웃는다.

남녀 사이의 감정이란 건 흐릿하게 두면, 언젠가는 꼭 망가지기 마련이다.



위의 이미지는 시아(Sia)의 ‘Chandelier’ 뮤직비디오.

MTV VMA ‘최고 안무상(Best Choreography Video)’ 수상,

공개 후 현재까지 YouTube 조회수 20억 회 이상 기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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