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의 하루

밤, 술, 새벽

by 응시

기생의 하루는 세 번 바뀌었다.


밤이 있었다. 술이 있었다. 새벽이 있었다. 이 셋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생의 몸 안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밤부터 이야기한다.


기방의 밤은 등잔이 켜지면서 시작됐다. 마루에 빛의 원이 생기고, 손님이 들어오고, 이름이 불렸다. 불린 기생은 손님 옆에 앉았다. 앉는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말을 맞추고, 웃었다. 여기까지는 보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일이 있었다.


손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 기생은 법적으로 천민이었다. 관허 기방의 기생은 기적에 이름이 올라 관청의 관리를 받았고 기방에서 배정하는 손님을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누가 올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사람인지 앉아봐야 알았다. 좋은 손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손님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은 기생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조건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다. 통제 불가능성이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내가 무엇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경험이 반복될 때, 몸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의식을 분리한다. 심리학에서 이것을 해리라고 부른다.


기생의 밤에 해리가 있었을까.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간접적인 흔적이 있다. 조선 후기 야담집에는 기생이 손님 앞에서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는 묘사가 드물지 않다. 이것을 당시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으로, 혹은 게으른 것으로 봤다. 그러나 몸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의식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상태 — 이것은 취함이 아니라 해리이다.


다음은 술이다.


기생에게 술은 업무 도구였다. 손님에게 따르는 것이 일이었다. 그런데 기방에서 기생의 음주는 금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님과 함께 마시는 것이 분위기의 일부였다. 기생은 따르면서 마셨다.


여기서 미묘한 역설이 생긴다.


밤의 트라우마에서 몸은 비자발적으로 의식을 분리한다. 러나 기생은 술로 자발적으로 해리 상태를 이어갔다. 의식을 흐리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하고, 기억을 끊는다. 차이는 하나다. 비자발적 해리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고, 자발적 해리, 즉 술을 마시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차이가 작아 보이지만 크다. 통제할 수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술이었다. 마실지 말지, 얼마나 마실지, 언제 멈출지. 기생에게 술은 마취이면서 동시에 유일한 선택이었다.


물론 이 선택에는 대가가 있었다. 자발적 마취가 반복되면 의존이 된다. 현대의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알코올에 의존하는 구조와 같다. 기방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기생은 오히려 드물었을 것이다. 마시지 않으면 밤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시지 않은 기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잔이 앞에 놓여 있다. 차 있다. 마시지 않는다. 이것도 선택이다. 마시는 것이 통제라면, 마시지 않는 것도 통제다. 다만 마시지 않으면 밤이 선명해진다. 감각이 둔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보인다. 모든 것이 들린다. 그것을 견디려면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새벽이다.


손님이 떠나고, 마루가 비고, 등잔이 꺼져 간다. 기방의 새벽은 기생에게 유일하게 자기 시간이었다. 밤에는 손님의 시간이고, 낮에는 기방의 시간이다. 새벽만이 기생의 것이었다.


기생은 가곡, 시조, 가야금, 거문고, 춤, 서화를 훈련받았다. 교방에서의 훈련 기간은 수년이었고, 수준이 높았다. 양반 자제의 교육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기술은 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가야금은 손님 앞에서 치는 것이었고, 노래는 손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은 목적을 벗어난다.


손님을 위해 배운 가야금이, 새벽 혼자 있는 방에서 울릴 때, 그 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손님은 없다. 기방 주인도 자고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손가락이 줄 위를 움직인다. 소리가 난다.


이것이 도구가 표현이 되는 순간이다.


기생이 남긴 시조와 가사 중 일부는 이 새벽의 산물이다. 황진이의 시조는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자기감정을 위해 쓴 것이다. 매창의 한시도, 홍랑의 시조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업무의 연장이 아니라, 업무가 끝난 뒤 남은 기술로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이 표현이 존재했을까. 밤이 평온했다면, 새벽에 가야금을 칠 이유가 있었을까. 고통이 예술을 낳는다는 낭만적 공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구조를 보자는 것이다.


통제 불가능한 밤이 몸을 분리시킨다. 술이 그 분리를 자발적으로 유도한다. 새벽에 혼자 남은 몸이, 유일하게 자기 것인 기술로, 자기 것인 소리를 만든다. 이 순서가 기생의 하루다.


밤 — 몸이 자기 것이 아닌 시간. 술 — 몸을 자발적으로 흐리게 하는 시간. 새벽 — 몸이 자기 것으로 돌아오는 시간.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 — 시조의 여운, 가야금의 떨림, 춤의 절제 — 그 일부는 이 새벽에서 태어났다.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손님이 떠난 뒤 남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기생의 하루를 유흥이라고 부르는 것은 손님의 언어다. 기생의 언어로 다시 쓰면, 그것은 유흥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마취였고, 때로는 창조였다.


그 창조의 시간은 기록되지 않았다. 새벽은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