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의 몸, 양반의 교양
기생은 어디에 속한 사람이었을까.
간단한 질문 같지만, 답하기가 어렵다. 기생은 모든 경계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신분부터 보자.
기생은 법적으로 천민이었다. 조선의 신분 제도에서 가장 아래에 놓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생의 일상은 천민의 일상이 아니었다. 양반과 동석했다. 양반의 언어로 말했다. 양반이 읽는 시를 읽었고, 양반이 듣는 음악을 연주했다. 교방에서 수년간 훈련을 받았다. 한시를 짓고, 서화를 그리고, 가곡을 부르는 기생은 교양의 수준에서 양반 부인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교양이 신분을 바꾸지는 않았다.
아무리 시를 잘 지어도 기생은 천민이었다. 아무리 양반과 친밀해도 양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교양은 기생의 것이었지만, 그 교양이 인정받는 자리는 기생의 것이 아니었다. 천민의 몸에 양반의 교양이 들어 있는 상태. 이것이 기생이라는 존재의 첫 번째 경계다.
노동의 경계도 있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기생의 노동을 분류하면 최소 세 가지로 나뉜다. 예술 노동 — 가무, 시, 서화. 감정 노동 — 손님의 기분을 맞추고, 대화를 이끌고, 분위기를 관리하는 것. 성적 노동 — 말하지 않아도 알려진 부분. 현대에서 이 세 가지는 각각 다른 직업이다. 예술가, 서비스업 종사자, 성노동자. 각각 다른 훈련이 필요하고, 다른 보호가 필요하고, 다른 감정이 소모된다.
기생의 몸에서는 이 셋이 분리되지 않았다.
한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술을 따르고, 술을 따르다가 손님의 손을 잡아야 했다. 어디서 예술이 끝나고 접대가 시작되는지, 어디서 접대가 끝나고 성적 서비스가 시작되는지, 경계가 없었다. 기생 자신도 그 경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심리적으로 무엇을 만드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심리학에서 정체성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형성된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의사는 치료하는 사람이다. 역할이 명확하면 자기 인식이 명확해진다.
기생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나는 예술가인가, 접대부인가, 그 이외의 무엇인가. 역할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 겹쳐 있으니,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이 흔들린다.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다른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이 노래가 끝나면 무엇이 올지 알고 있다. 몸은 노래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 분리 —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다음에 올 것 사이의 분리 — 가 반복되면,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내가 진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의미를 잃는다. 모든 것이 역할이고, 역할 아래에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공간의 경계도 있었다.
기방은 사적 공간이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민간 영업장이었다. 그런데 기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공적이었다. 관청의 연회가 기방에서 열렸다. 외교 사절의 접대가 기방에서 이루어졌다. 정치적 회합이 술자리를 빌려 기방에서 진행됐다. 사적 공간에서 공적 기능이 수행됐다.
기생은 이 공간에 살았다. 사적인 공간이지만 사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곳. 자기 방이 있었지만, 그 방은 언제든 손님에게 열렸다. 문을 닫을 권리가 없었다. 잠을 잘 때도 불릴 수 있었다.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려면 혼자 있어야 한다. 혼자 있을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름의 경계가 있었다.
기생에게는 이름이 두 개였다. 기명(妓名)과 본명. 기명은 기방이 지어줬다. 순임, 옥란, 매화, 연분.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손님 앞에서 불리는 이름이었다. 본명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기적(妓籍)에 기명만 올랐고, 본명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은, 자기가 두 개라는 것이다. 기명으로 불릴 때의 자기와, 본명으로 불릴 때의 자기가 다르다. 문제는 본명으로 불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기방에서는 기명으로 불린다. 기방 밖에 나갈 수 없다. 그러면 본명은 누가 부르는가.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불리지 않는 이름은 사라진다. 자기도 잊는다. 기생이 자기 본명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기록이 없다.
기생은 이 모든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천민이면서 교양인. 예술가이면서 접대부. 사적 공간에 살면서 사적 시간이 없는 사람. 이름이 두 개이면서 진짜 이름이 없는 사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기생이라는 직업의 본질이었다.
현대에도 이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그 역할 아래에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되는 사람들. "나는 엄마인가, 직장인인가, 아내인가, 나인가." 역할이 겹칠수록 자기가 희미해진다.
기생은 이 희미해짐을 직업으로 살았다.
그 희미한 자리에서 자기를 찾은 기생이 있었을까. 경계 위에 서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자기 자리로 만든 사람이 있었을까.
기록에는 없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