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하게 연락을 주고받아도, 지지부진한 우리 사이
네 연락을 바라지않았다. 이젠 나는 너 없이도 그럭저럭 살만하고, 언젠가 너의 이름이 들려올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넌 흔한 이름이었으니까. 의식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만 너와 내가 전에 연애를 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근데, 그런 네게서 연락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네게 이래서 저래서 미안해'….
좀 더 뻔뻔한 버전도 있다. '잘 지내?'
바랐을 때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너의 연락만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핸드폰 전원 버튼만 눌렀다 껐다 했으면 차라리 다행일 텐데.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찾아다녔다. 네 직업, 네 학교, 네 이름, 내가 아는 네 흔적 전부를 고루고루 헤집었다. 혼자 찌질찌질대면서도 너에게 절대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네게서 바랐었던 연락이 왔는데, 난 헤어진 그 날로 끌어 내려졌다. 어둡고 앞이 안보이던 때와 장소로. 분명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난 네 연락을 받을 때마다 버림받았던 때로 돌아간다. 비참하게 서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답장을 한다. "응 오빠는?"
넌 모든 것을 믿었던 내게 잠수 이별로 답했다. 네가 일전에 연애하던 사람과 다시 사귀는 걸 알게 됐다. 사랑받는 연애만 해오던 내게 너의 진실은 충격이었다. 내가 알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 제일 힘들었다. 너는 내게 묵묵하고 솔직한 사람이자 진중한 사람이었다. 아픈 연애를 했다는 너의 고백이 어쩌면 내게 큰 믿음을 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과 잘 안되거나, 혹은 헤어졌을 때 그에게서 어김없이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고. 꼭 내가 잘 지낼 때 연락하더라. 아니, 막 잘 지내게 됐을 때. 어디 감시라도 하는 거니? 그런 네게 대답할 때 까지는 정말 '잘 지내' 그 자체였는데, 대답 후 기다리는 나는 '못 지내'를 다시 쓰고 싶은 심정으로 돌아갔다. 널 계속 기다리기만 하던 그때로.
왜 항상 너는 내가 다 잊을 때쯤 연락을 하는 걸까
그건 아마, 내가 이제 널 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너 좋게 생각하지도, 나쁘게 생각하지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떠올리지 않고 너를 위해 나의 타는 젊음과 애타는 마음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조금씩 지워지는 걸, 네가 아는 거다. 남자 친구 좀 했다고.
너에게 시간을 쓰지 않자 그제야 너는 내게 시간을 썼다.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자 너는 나를 갑자기, 떠올렸다.
우리 둘이 지켜야 내야 할 추억의 몫을, 그간 나는 혼자 책임졌다. 내가 그를 지켜내려 아등바등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는 더 이상 쏟을 힘이 없어지자, 그 추억은 오로지 네 빚으로 남아 갑자기 네게 들이닥쳤을 거다. 당황스러웠겠지, 놀랐겠지. 어디서 이런 생각이 자꾸 쏟아질까 겁이 났겠지. 고민을 하다, 혹은 한번 툭 하고 내게 힘듦을 토로한 거겠지.
너 어디 갔어? 내 건 네가 책임져야지
소리쳐봤자다. 그리워했던 나의 인연아. 나는 이제 빠지려고. 이젠 힘들고 싶지 않아. 나는 그동안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웠거든. 나는 서서히 침잠하면서 추억을 굴리고 굴리고 또 굴렸어. 그 빚에는 나의 자책과 슬픔과 괴로움, 너의 환상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이제 너는, 너 혼자 그걸 떠안고 살아.
너와 이별하고 나는 아픔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외로움을 잘 다스리는 데만 꼬박 몇 개월을 썼다. 배울 때를 놓친 너는, 아마 좀 힘들겠지. 처절하게 외롭고 처절하게 힘들길 바란다. 그래도 나의 아픔에, 나의 당혹에 발 끝만큼도 못 미칠 테니까. 너에게 줄 남은 내 감정이 이제 없음이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