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의 얼굴

한 칸 생각

by 한칸생각


나는 한때, “평범한 하루”라는 말을

그저 재미없고,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부전증으로 강남 삼성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6인실 병동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평범함이 얼마나 값비싼 선물인지, 뼈저리게 배우게 되었다.


수술 후 병실에서의 시간은 시계가 흐르는 방식부터 달랐다.


하루는 길었고, 밤은 더 길었다.

사람들은 아프면 조용해진다고 하지만, 병실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소리로 가득했다.


낮게 울리는 기계음, 간호사의 발걸음, 누군가의 숨소리, 커튼 너머의 작은 신음.


그리고 그 사이사이, 환자들만 알아듣는 어떤 “기다림”이 있었다.


퇴원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긴 터널 끝에 있는 출구처럼,

눈앞에 보이지만 쉽게 허락되지 않는 목표였다.


퇴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수술 후 방귀가 나와야 미음을 먹을 수 있고,

처음 변을 본 뒤에야 정식 식사가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소변이 원활히 나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퇴원 절차가 진행됐다.


이 과정을 글로 적으면 너무나 단순하고, 어쩌면 조금은 민망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병실 안에서 그것들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신호였고,

무엇보다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허락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


방귀가 나오는 것, 소변을 보는 것, 변을 보는 것.


누구도 그것을 “목표”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그 평범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도전이 되고,

하루의 승패를 가르는 성취가 된다.


수술 후, 어떤 환자가 방귀를 뀌는 순간이 오면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쳐준다.


처음에는 나도 그 장면이 낯설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축하할 일인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그 박수는 방귀를 축하하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것이었고,

회복의 시작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 박수는 환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아, 이제 조금씩 다시 돌아오고 있어.”


누군가는 소변을 잘 봤다고 간호사에게 자랑한다.

그 자랑은 유난히 아니었다.

정말로 그 사람에게는

“오늘 내가 해냈어요”라는 말과 같았다.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자랑거리가 되는 곳.

누구에게는 웃음이 되는 일이,

누구에게는 눈물 나는 희망이 되는 곳.

병실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상하리만큼 많은 “계획”을 세웠다.

퇴원하면 아내랑 덕이국숫집에 가야지.

밀가원 칼국수도 꼭 먹어야지.

카페 309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를 마셔야지.

그리고 근처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야지.


그 계획들은 거창한 꿈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도 나지 않을 하루의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평범함이 목표가 되었다.


예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때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되어 있었다.


병실에서 바라보는 창밖 하늘은 유난히 멀어 보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멈춰 있는 느낌.

사람들은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고,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웃고,

누군가는 가족과 통화하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겠지.


그 모든 장면이

그날의 나에게는 너무 찬란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아렸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진짜 소중한 것을 모르고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어쩌면 우리는

건강할 때는 건강을 모르고,

함께 있을 때는 사랑을 모르고,

평범할 때는 평범함의 가치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일상이란,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러다 어느 날, 그것이 잠시라도 멈추면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그동안 내가 누리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나는 병실에서 배웠다.

삶은 거대한 사건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살아 있다는 건

대단한 업적이 아니라,

오늘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그런 사소한 장면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나는

평범한 하루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으려 한다.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아무것도 없는 날”이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그건 아무것도 없는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날이고,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날이며,

소중한 보물이 조용히 놓여 있는 날이니까.


진짜 지혜는

잃고 나서 깨닫는 게 아니라,

아직 내 손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알아보는 것 아닐까.


오늘도 평범한 일상이

조용히 내 곁에 있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