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구조, 움직이게 하는 순서

이거 하나 바꿨을 뿐인데

by 한끗작가



“니가 쓴 보고서를, 니가 한 번 소리 내서 읽어봐.”

남편은 부하직원들에게 그렇게 말한단다.

“입에 안 붙지 않냐?“

당사자도 못 읽는 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읽냐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웃고 말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자꾸 맴돌았다.

입에 안 붙는 글.

읽었는데 기억에 남지 않는 글.

다 말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글.

—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보고서를 많이 썼다.




처음부터 틀린 말은 없었다.


형식도 맞았고, 데이터도 충분했다.

그런데 회의실의 반응은 늘 비슷했다.

눈은 화면에 있지만, 생각은 다른데 있는 사람들.

결론을 말해도, ‘그래서 뭐?’ 갸우뚱한 시선들.




어디서 잘못된 걸까?


보고서를 쓸 때는 늘 급하다.

‘이유부터 말할까? 아니면 배경부터?’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일단 다 쏟아낸다.

현황, 문제점, 방향, 기대효과.

정석대로 구성했으니, 틀릴 건 없다고 믿는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면 돌아오는 반응은 이렇다.


“그래서 뭐가 바뀐다는 거예요?”


정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내용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순서가 틀린 글이었다.


이유가 아니라 맥락이 없었고,

내용이 아니라 움직임의 타이밍이 빠져 있었다.



구조는 정보가 아니라 흐름이다


우리는 정보를 순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은 논리보다 맥락을 기억하고,

문장보다 리듬에 반응한다.

그래서 정보가 아니라 흐름이 기억된다.


정확한 정보를 담았다고 해서 설득되는 건 아니다.

사람은 내용을 기억하지 않는다.

느낌을 기억하고, 흐름을 따라 반응한다.



Before


1. 보고 배경

최근 MZ세대 구성원의 조직 내 정착률이 낮아지고 있음

2. 현황 분석

입사 2년 이내 퇴사율 28%, 사내 만족도 조사 결과 하위 3위

3. 개선 필요성

기존 제도가 가족 중심, 라이프스타일 다양성 반영 부족

4. 개선 방향 제안

선택형 복지 포인트 도입, 사내 휴식공간 리뉴얼 등


논리는 맞고 데이터도 충분했지만, 싸늘했다.

“근데 이거 하면, 뭐가 얼마나 나아져요?”

질문은 딱 그 한 줄이었다.




After

다시 써서 이렇게 바꿨다.


1. 제안 핵심 요약 (첫 슬라이드)

“선택형 복지포인트 도입 시, 1년 내 퇴사율 약 7% 감소 예상”

도입 기업 평균 데이터 + 우리 조직 적용 시뮬레이션

2. 왜 지금 도입해야 하는가

퇴사율 증가, 사내 요구 변화, 경쟁사 비교

3. 무엇이 달라지는가

구성원 선택권 확대, 휴식공간 만족도 상승 사례 등

4. 예상 효과 및 리스크 관리

비용 시뮬레이션, 단계별 도입 전략



같은 내용이지만, 순서를 바꿨다.

문제부터가 아니라, 바뀌는 미래부터 보여주고

그다음에 왜, 어떻게,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설명했다.


회의는 15분 만에 끝났다.

“이건 바로 시행 검토해 보자”는 말과 함께.




설계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설계자는 문장을 예쁘게 다듬는 사람이 아니다.

설계자는 ‘이 말을 지금 왜 해야 하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다.


내용이 아니라 순서를 고친다.

문장이 아니라 인지의 흐름을 감각한다.

그래서 설계자는 문장을 다시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반응할 흐름을 다시 짜는 사람이다.




결국, 다시 쓰는 이유는 하나다


다 말했는데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건 정보가 아니라 구조가 틀렸다는 신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쓴다.

내용을 바꾸기보다,

순서를 바꾸고, 타이밍을 조정하고,

읽는 사람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글을 고치는 게 아니다.

‘받아들이는 순서’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설계는 기술이다.

동시에 설계는 감각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글, 움직이게 하는 글은

AI가 건네준 글이 아닌 ‘다시’ 쓰여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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