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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예술 같은 중화요리, 곡금초 사부의 '상해루'

이한기의 음식이야기 - 중화요리의 지존, 동탄 '상해루'

by 이한기
동탄 상해루 오너 셰프인 곡금초 사부가 직접 만든 중화요리들.


곡금초 사부. 동탄 상해루(031-8015-0102)의 오너 셰프다. 화교 출신 중국 요리계의 '맏형'급이다. 사람들에게는 2011년 10월 SBS <생활의 달인> 탕수육 편에서 우승을 차지한 '탕수육 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현역으로 직접 요리를 만든다.


내 기억으로 곡금초 사부를 처음 뵌 건 3년 전쯤, 정호영 셰프가 운영하는 카덴에서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간단히 인사를 한 정도였다. 두 번째도 우연히 만났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후 서울에 오실 때 가끔 번개처럼 뵙곤 했다.


상해루의 음식은 정평이 나 있지만, 거리가 좀 멀어서 간다 간다 하면서 막상 짬을 못 냈다. 예전에 조치원 출장 다녀오는 길에 인사도 드릴 겸 늦은 점심을 한 게 다였다. 항상 곡금초 사부께 미안하던 차에 '상해루 원정단'이 꾸려져 살짝 숟가락을 얹고 동탄행에 탑승했다.


곡 사부께서 준비한 10가지 요리에 볶음밥까지 추가해 모두 11가지 음식이 나왔다. 대게살볶음, 멘보샤, 해삼주스, 멘보샤+굴튀김, 자연송이전복, 기아해삼, 자연송이소고기볶음, 육미가지튀김, 달인등심탕수육, 볶음밥 등. 한두 가지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멘보샤도 최상급이고, 볶음밥도 풍미와 식감이 독특했다.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에다 입맛을 사로잡는 소스가 일품이었다. 오늘은 곡금초 사부께서 요리를 하고, 또 다른 요리 재료를 준비하느라 일행들과 간단한 인사만 나눴다. 다음번에는 곡금초 사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 나도 곡금초 사부의 인생역정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다 이 기사가 눈에 띄었다. 2015년 3월 <중부신문> 구민주 기자가 쓴 글이다. 맥락이 왜곡되지 않는 선에서 분량만 약간 줄였다. 그래도 길긴 하지만,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덧붙인다.




1950~1960년대 배고픈 시절이었다. 당장 먹는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화교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동네에서 구둣방 일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고생시킬 수는 없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요리집(당시 중식당) 배달 일을 시작했어요."


나무로 만들어진 배달 가방에 짜장면, 짬뽕 등 음식을 담고 배달을 했다. 비가 오면 물을 먹은 나무 배달통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2년간의 고달픈 배달 생활. 어느새 한쪽 팔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은 중식당에 들어오기 힘들었어요. 대부분의 조리사들이 화교였죠. 당시 서울에 있는 큰 중식당에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봤어요. 주방은 16살 때 처음 들어갔죠."


하루 종일 일만 했다. 명절 빼고는 쉬는 날도 없었다. 8시부터 조개탄을 깨 콧구멍까지 새카매질 정도로 불을 피웠다. 그릇도 닦고 청소도 하고 틈틈이 주방 일을 곁눈질로 배웠다.


곡 셰프의 성실함은 '대려도', '아서원', '태화원' 등 내로라하는 중식당을 모두 거치며 기술을 익혀나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광의 순간은 일찍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대사부들 밑에서 기술을 배웠던 곡 셰프는 27살 젊은 나이에 서울 신촌 ‘만다린’에서 12명의 조리사를 거느린 총 주방장이 됐다. 조리장도 칼판도 곡 셰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곡 셰프는 경북 영천에서 작은 중식당을 운영하다 고민 끝에 1990년대 초에 서울에서 취영루를 열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0년대 초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남 분당에서 '만다린'을 개업했다.


곡 셰프의 만다린은 큰 인기를 끌었다. 13개의 분점이 생기고, 백화점 내에도 입점해 손님들의 입맛을 잡았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그런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찾아왔다. 가게가 늘어나면서 점점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다. 평생 요리만 했던 그에게 수많은 가게를 이끌어 갈 경영능력이 부족했고, 이는 사업 실패로 이어졌다. 건강도 나빠졌다. 곡 셰프는 결국 모든 가게를 접었다.


곡 셰프가 지금의 상해루를 다시 열게 된 것은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불 앞에서 진지하고 자신의 요리에 정직하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요리의 생명을 안다고 할까요. 무엇을 어떻게 넣어야 맛이 나는지를 아는 거죠. 기술로는 '이게 정석이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곡 셰프는 좋은 재료를 빠른 시간 안에 사용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선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요리의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손님은 모를 수 있어도 곡 셰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후배들에게도 냉장실에 들어간 재료는 24시간을 넘기지 말라고 주문한다.|<중부신문>, 2015년 3월 24일



※ 이 글은 2016년 8월 25일 동탄 <상해루>를 방문한 뒤 썼습니다. <상해루>는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상해루의 해삼쥬스.
상해루의 멘보샤+굴튀김.
상해루의 자연송이소고기볶음.
상해루의 육미가지튀김.
상해루의 달인등심탕수육.
상해루의 볶음밥.
동탄에 있는 중화요릿집 <상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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