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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호랑이배꼽 생막걸리'를 만드는 사람들

아빠 서양화가, 엄마 김치명인, 큰 딸 패션 디자이너, 작은 딸 사진가

by 이한기
서양화가 이계송 화백.
이계송 화백의 둘째 딸 이혜인 대표.
'호랑이배꼽'과 '소호'를 빚는 밝은세상 녹색영농조합 전경.


#탐방기|'호랑이배꼽 생막걸리'와 증류 소주 '소호(Soho)'를 만드는 밝은세상 녹색영농조합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호랑이 형상인데, 평택이 딱 배꼽 위치입니다. 그리고 배꼽은 탯줄로 부모와 자식이 연결되는 곳입니다."


왜 막걸리 이름을 '호랑이배꼽'이라고 붙였냐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10월 31일 오후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댓골재 양조장을 방문했다. '댓골재'는 일제시대 이 동네가 대나무골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올해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한 '찾아가는 양조장' 가운데 하나다. 술 이름만큼이나 양조장을 운영하는 가족들의 이력이 독특해 눈길을 끈다.


'호랑이배꼽 생막걸리'와 증류 소주 '소호(Soho)'. 소호는 '웃는 호랑이'라는 뜻이란다. ⓒ 대동여주도


10년 전 호랑이배꼽 생막걸리를 만든 아버지 이계송 씨는 올해로 만 70세.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추상화를 그리는 원로 서양화가다. 어머니 이인자 씨는 도예가 겸 요리연구가다. 큰 딸 이혜범 씨는 패션 디자이너로 오랫동안 일했고, 작은 딸 이혜인 씨는 사진가였다. 말 그대로 '한 예술 하는' 가족들이 모여 각자의 재능을 쏟아부으며 술을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이계송 화백이 둘째 딸 혜인 씨에 술도가 대표 자리를 넘겨줬다.


이계송 화백의 그림은 독일에서 호평을 받으며 국내보다 더 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다국적 기업인 독일 머크(Merck) 사가 한국 화가 가운데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세계화 할 수 있는 작가로 이 화백을 선정해 전시회도 열고, 그의 그림들로만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독일에 본사를 둔 생명과학기업 머크(Merck)는 올해로 350주년을 맞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지난해 재무 구조를 봐도 전체 매출은 153억 유로(약 19조9천361억원)이며 연구개발비는 21억 유로(약 2조7천363억원)을 나타냈다. 전체 매출 10분의 1 이상을 연구 개발에 투자한 것이다.


부인인 요리연구가 이인자 씨는 지난 9월 28일 SBS <폼나게 먹자> 방송에 '준치 김치' 명인으로 출연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불리는 청어과 바닷물고기다. 1980년대까지는 흔한 생선이었는데, 안타깝게도 2010년 이후로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있다. 해수 온도가 상승하고 남획으로 씨가 말라버렸단다. 그래서 이인자 씨는 요즘 준치 대신 밴댕이로 김치를 담그고 있다.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로 유명한 그 생선 맞다.


도예가이자 요리연구가인 이인자 씨.
이인자 씨가 만든 밴댕이 김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나온 이계송 화백의 생가.


댓골재 양조장이 위치한 곳은 평택항과 5분 거리에 있는 '반농반어(半農半漁)'촌이다. 양조장 옆에는 오래된 한옥집이 있다. 1944년에 지어진 이 집에서 이 화백이 태어났단다. 이 집은 지난 2015~2016년에 방영된 tvN <응답하라 1988>에 나온 적이 있다. 가난하게 살던 정봉이(안재홍)네 집으로 잠깐 나왔다가, 정봉이가 복권에 당첨돼 가세가 펴면서 이사하는 스토리에서 까메오처럼 등장했다.


74년 전에 지어진 이 한옥 마당 가운데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면 지하수가 나온다. 이 물은 지하 40m 암반수인데, 화강암과 화강암 사이에 흐르는 물을 끌어올린 것이어서 지금까지 일정한 양이 나오고 오염되지 않았다며 이 화백이 자랑스러워한다. 이 화백은 "주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관정(管井)을 만드는데 당시 일주일에 30만원 정도 했는데, 여기는 화강암 바위를 뚫어야 해서 40일 120만원이 들었다"고 설명한다. 예전에 정미소를 해서 이 관정 위치가 제헌의회 때 동네 투표함을 놓는 자리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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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송 화백이 태어난 한옥. 1944년에 지은 고택이다.


팽택이 고향인 이 화백은 애초 배 과수원을 하면서 체험마을을 만들려고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양조장으로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집 초입에는 수령 45년쯤 되는 큰 느티나무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 있다. 느티나무 왼편에는 이 화백의 생가인 한옥 집이 있고, 오른편에는 60년쯤 된 황토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 황토집에서 '호랑이배꼽 막걸리'와 증류식 소주 '소호'를 빚는다. 이혜인 씨는 농반진반 "가장 작은 양조장"이라고 말한다.


이 곳에서는 '무화정주', 불을 쓰지 않고 술을 빚는다. 쌀도 찌거나 짓지 않고 생쌀을 사용한다. 백미 60%와 현미 40%를 섞는데, 이때 쌀겨까지 넣는다. 발효 기간은 30~40일 정도, 이후 50일 정도 저온 창고에 둔다. 술을 처음 빚어서 출고하는 데까지 약 100일 정도가 소요된단다. 증류식 소주 '소호(Soho)'를 증류하는 기계는 이 화백이 직접 설계해 만들었다고 한다.


증류는 주로 2, 3회이지만 최대 4회까지 한다고. 그리고 달항아리에 넣고 2년 이상을 숙성시킨다. 소호 36.5도는 2회 이상 증류하고 2년 이상 숙성시킨다. 소호 56도는 3회 이상 증류하고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증류는 겨울철에 냉침 방식으로 한다. 필터를 써서 여과하지 않고, 안팎의 온도 차이로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다. 소호는 36.5도로 365일이자 사람 몸의 온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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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빚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이혜인 대표.


'소호(Soho)' 라벨에 이계송 화백 그림을 넣다


소호 56도짜리 술병에는 이 화백의 그림 '상춘(常春)'을 라벨로 썼다. 술병 자체만으로도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 화백은 본인의 그림 스타일에 대해 재료는 서양화처럼 오일을 쓰지만, 동양화 방식으로 그린다고 말한다.


양조장 옆 카페 겸 식당으로 쓰는 갤러리 내부는 이계송 화백의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그림들로 둘러싸여 있다보니 실제 갤러리에 들어온 느낌이다. 이 곳에서 이인자 씨의 요리로 식사를 하기도 하는데, 탐방단이 찾아갔을 때는 검정콩부두와 메밀전병, 호박전, 그리고 밴댕이 김치 등을 내놨다. 아내가 만든 음식과 아버지와 딸이 빚은 술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예술과 술은 느끼하지 않고 담백해야 한다. 좋은 작품과 잘 팔리는 건 다르다. 예술이나 술이나 마찬가지다."


고향에 정착해 가족들과 술을 빚는 서양화가 이계송 화백은 다소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그린 작품과 빚은 술에 대한 철학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버스에 탑승하기 전, 내게 넌지시 한 마디 건넸다.


"(한옥 집을 가리키며) 겨울 전에 저기 구들 공사를 할건데, 이곳 지날 일 있으면 들러서 술 한 잔 하고 가세요. 김장 김치만 있어도 밤새 마실 수 있어요. 예전에도 새벽까지 얘기하며 술을 마시곤 했어요."




※ 이 글은 2018년 11월 '찾아가는 양조장' 투어를 다녀 온 뒤 썼습니다. 호랑이배꼽 양조장 체험 문의는 031-683-0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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