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단상|을지로 노가리골목 시조 <을지OB베어>
"누님, 오랜만입니다. ^^ 맞은편 야장은 언제 만드셨어요?"
"2년쯤 됐는데..."
"아......"
"그만큼 삼촌이 안 왔다는 거야."
오랜만에 찾아간, 을지로3가 노가리(호프)골목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을지OB베어> 사장님과 짧막한 안부인사를 나눴다. 강호신 사장님은 <을지OB베어> 강효근 창업주의 따님이다. 아버지는 은퇴하셨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1980년 12월에 문을 연 <을지OB베어>는 '우리나라 최초의 생맥주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가게 위치는 물론 평수도 41년째 20㎡(6평) 그대로다. 처음에는 노가리 100원, 생맥주는 480원. 지금은 노가리 1000원, 생맥주 3500원.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고, 호프집 가운데 유일하게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로 뽑혔다.
3년 전, 건물주가 임대차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명도 소송을 제기하면서 <을지OB베어>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임대료를 올려줄테니 이곳에서 <을지OB베어>의 역사를 이어나가게 해달라는 읍소도 소용 없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지금 그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다.
노가리골목 주변을 둘러보니, 한 집 건너 한 집이 <만선호프>. 그 일대 호프집의 절반 가량에 '만선' 상호가 달려 있었다. 말그대로 '만선타운'. 마치 피맛골이 헐린 듯한, 인사동이 정체불명의 거리로 바뀐 듯한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 회오리바람 속에 <을지OB베어>가 문을 닫지 않은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당사자에겐 계속되는 고통의 시간이었겠지만.
가게 맞은편 <을지OB베어> 야장에서 지인들과 생맥주를 기울이는데, 사장인 강호신 누님이 작은 접시를 들고 왔다. 우리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고는 한 마디. "(예전보다) 메뉴가 많이 늘었어. 이건 속초에서 올라온 학꽁치야. 먹어봐." 말그대로 츤데레의 반가움 표시다.
"누님, (북어만큼 큰 사이즈의) 이 노가리가 한 마리에 1000원이면 장사해서 남는 게 있어요?"
"노가리 안주를 원가보다 싸게 낸 지는 오래됐어. 원가 생각하면 삼사천원은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창업주)의 창업정신 때문에 '싼 가격에 좋은 안주' 철학을 유지하고 있는 거야. 올해 아흔다섯이신데, 아직도 (가게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관심이 많으셔서 가격을 못 올려."
"그렇게 안주를 손해보면서 팔면..."
"그러니까, 삼촌이 2년 넘게 안 오지 말고 앞으로는 분기별로 한 번 이상은 꼭 오라는 거야."
1000원 노가리, 2000원 학꽁치를 씹으면서 생맥주를 여러 잔 비웠다. 안주에서 손해보는 걸 맥주로 커버하는 것일테니. 코로나 전에도 <을지OB베어>는 밤 11시에 문을 닫았다. 이것도 창업 철학인데, 자정이 넘으면 손님들이 귀가하는데 어려움이 있을테니 스스로 영업시간 욕심을 줄인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을지로3가 노가리골목. '만선'에서 절망을 보았고, '을지OB베어'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절망은 거대했고, 희망은 약소했다. #2021_0227
※ 야간·실내 사진은 5년 전에 찾아갔을 때. 자세히 보면 강호신 사장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