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단상|前 KBO 사무총장... 불운했던 개인사 안타까운 죽음
※ 이 글은 지난 2016년 9월에 작성됐습니다. 블로그에 썼던 글을 브런치로 옮겨둡니다.
하/일/성/
중2였던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박철순, 신경식, 윤동균... 원년부터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이었고, 지금까지 일편단심 두산 베이스 팬이다. 기업 OB와 두산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다. 당시에는 동대문운동장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외야 표를 끊고 들어가, 개구멍을 통해 내야로 와서 구경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는 사격을 잘 했는데, 밖에서는 야구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이유는 딱 하나.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KBS 전속 해설위원으로 픽업된 하일성 선생이 고등학교 체육교사였기 때문이다.
그 해였던가 그 이듬해였던가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해설자가 됐지만, 프로야구 시작 후에도 학교에서 종종 봤다. 내가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는 '전(前) 교사'였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 했다.
'두주불사'여서 상금을 받으면 그 두세 배가 술값으로 나간다는 하일성 선생을 직접 본 건 2006년 12월 18일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포장마차 토크'에서다. 그는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었고, 나는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었다.
스포츠 전문 시민기자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편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라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학교 이야기를 하니 "내 제자를 이런 자리에서 만나니 기쁘다"며 호쾌하게 반겨주었다.
오래된 프로야구 팬들은 대개 '하일성 파'와 '허구연 파'로 나뉜다. 나는 원년부터 '해설은 하일성'이었다. 데이터 야구 해설은 아닐지라도 뭔가 정감 있는 '구라'에 끌려들어 갔다.
하일성 선생은 KBO 사무총장 이후에도 해설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 그만뒀다. 그리고 몇 차례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최근 사기 혐의까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속 사정이 있었겠지만, 씁쓸했다.
오늘 벼락같은 부음 기사를 봤다. 하일성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그의 개인사, 가정사, 사회사... 모두 잘 모른다. 그러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무척 큰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야구 팬으로서 그의 해설이 내 온몸에 새겨져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무리했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하일성 선생님, 부디 그곳에선 평화롭길 바랍니다.